[2/11] 골목과 공원, 그 안의 사람들

공원의 아침, 카페의 쉼표, 그리고 밤의 거리에서 마주한 부에노스아이레스

by 신정호


아침, 다시 운동화를 신다

새벽 내내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였다. 빗소리는 창문을 세차게 두드렸고, 바람이 불 때마다 창틀이 덜컹거렸다. 방 안이 번개의 불빛에 잠깐씩 환해졌다. '이 정도면 오늘 러닝은 쉬어도 되겠지?' 침대에 누워 스스로를 설득해 보았다. 비가 계속 내린다면 굳이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핑계가 생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침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이 맑게 개어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나갈 걸.' 다시 한번 러닝화를 신었다. 전날 처음으로 도시를 달려보았을 때 느꼈던 긴장감은 사라졌고, 오늘은 조금 더 익숙한 기분이었다.


이번에는 좀 더 멀리 가보기로 했다. 목적지는 트레스 데 페브레로 공원(Tres de Febrero Park).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공원 중 하나로, 러너들에게도 인기 있는 곳이라고 들었다.


거리를 따라 달리면서 새벽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시를 지나쳤다. 반쯤 내려진 셔터 사이로 커피 향이 흘러나왔고, 물청소를 끝낸 거리에는 한층 더 깨끗한 공기가 감돌았다. 어제 처음 봤을 때 무심히 스쳐 지나갔던 풍경들이 오늘은 조금 더 익숙하게 다가왔다.

공원 입구에 도착하니 넓은 초록색 공간이 펼쳐졌다. 잔디밭 사이로 이어진 길에서는 러닝하는 사람들과 벤치에 앉아 쉬는 사람들이 보였다. 호수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산책을 하고 있었고, 어제는 지도만 보고 찾아왔던 곳이 이제야 어떤 분위기인지 실감이 났다.


속도를 올려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축구공을 차며 달리는 한 남자가 보였다. 공을 터치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리듬을 맞추며 뛰었고, 가볍게 공을 차 올리면서도 흐트러짐 없이 속도를 유지했다. '역시 메시의 나라답네.' 축구가 일상의 일부인 이 도시에서, 아침 러닝 중에도 이런 장면을 마주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땀에 젖은 티셔츠가 몸에 달라붙었지만,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았다. 숨을 고르는 것도 어제보다 훨씬 자연스러웠고, 한 시간 가까이 달린 후에도 여유가 느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도시는 나에게 탐색의 대상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반복되는 행동이 쌓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거리의 풍경이 어제보다 가깝게 느껴졌고, 숨을 고르는 순간도 한결 편안하게 다가왔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어제는 일부러 지도까지 확인하며 걸었던 길이었지만, 오늘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발이 향했다. 길가의 작은 빵집에서 풍겨오는 고소한 향이 더 친숙하게 느껴졌고, 출근길을 서두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씩 익숙해졌다. 하루 만에 모든 게 익숙해질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조금씩 내 속도에 맞춰 적응해 가고 있었다.



넷플릭스 속 공간을 직접 경험하다

오후, 라마제타(La Mezzetta)로 향했다. 이곳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길 위의 셰프들’에도 나왔던 곳이다. 단순히 피자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면 속 공간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지만, 타려던 버스가 멀리서 오는 걸 보고 달려갔음에도 불구하고 떠나버렸다. 분명히 내가 뛰어가는 걸 봤을 텐데… 하지만 가만히 서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던 건 내 착각이었다. 버스마다 정류장 내에서도 서는 위치가 다 정해져 있었던 것이었다. 다시 정류장 내 지정된 구역에서 기다렸고, 몇 분 뒤 도착한 버스를 타는 것은 성공했다.

라마제타에 도착하자, 문을 열기도 전에 강렬한 치즈 향이 퍼졌다. 가게 내부는 넓지 않았지만 활기찼다. 줄을 서서 대표 메뉴인 푸가세타 피자(Fugazzeta) 한 조각과 소고기 엠파나다(Empanada de Carne), 그리고 킬메스 스타우트(Quilmes Stout) 맥주를 주문했다.

푸가세타 피자는 1.5kg 이상의 모짜렐라 치즈가 듬뿍 들어가고, 그 위에 또 다른 반죽과 양파를 얹어 구운 독특한 스타일이었다. 두께도 상당했다. 한 입 베어 무니 치즈가 쭉 늘어났다. 양파의 고소한 맛과 부드러운 치즈의 조합이 색달랐지만, 나에게는 약간 짠 편이었다. 엠파나다는 겉은 바삭했고 속은 촉촉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한국식 만두가 더 익숙하고 맛있게 느껴졌다.

옆자리의 현지인 두 명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다. "Hola!" 먼저 인사를 건넸고, 피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들은 혼자서 세 조각을 먹고 있었다. "Tres?" 엄지를 치켜세우며 물었더니, 그들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스페인어 실력이 부족했지만, 아는 단어를 최대한 활용하고, 번역기의 도움도 받으며 짧지만 즐거운 대화를 이어갔다. 언어는 배우는 것보다 직접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말을 걸면, 상대도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핸드폰 배터리 방전, 위기를 해결하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낮에 사용한 핸드폰 배터리가 점점 줄어드는 걸 보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숙소에 돌아가서 충전하면 되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일이 빨리 벌어졌다.숙소로 가는 버스 안에서 핸드폰이 완전히 꺼져버렸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막상 내리고 나서야 문제를 실감했다."숙소 주소를 기억하지 못한다."다행히 숙소 근처 버스 정류장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었고,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정류장까지는 도착할 수 있었다.하지만 정류장에서 숙소까지 가는 길이 문제였다.지도에 의존하던 습관 탓에 길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고, 방향 감각마저 흐려져 있었다.


그때 문득 가방 안에 노트북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근처 카페에 들어가 "와이파이 되나요?" 라고 묻고, 카페라떼 한 잔을 시켰다.그리고 노트북을 켜고 구글맵을 열어 숙소 위치를 확인했다.라떼를 한 모금 마시면서 한숨을 돌렸다."이제는 모든 걸 온라인에만 의존하면 안 되겠네."그 자리에서 바로 노트에 숙소 주소를 적었고, 간단한 약도도 그렸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핸드폰이 없어도 당황하지 않도록 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노트북을 열어 짧게 업무도 봤다.카페는 조용했고, 가격도 부담스럽지 않았다."여기라면 가끔 나와서 일하기에도 괜찮겠는데?"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면서, 이곳을 새로운 나만의 공간으로 만들어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 산책 - 직접 경험해봐야 아는 것들

숙소로 돌아와 잠깐 쉬었다가, 밤에 잠시 나가보기로 했다.이곳에 오기 전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밤에 위험하다." 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기에,막연히 어두워지면 밖에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 남의 말만 듣고 판단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숙소 주변을 30분 정도 걸어보기로 했다.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예상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식당들은 여전히 영업 중이었고, 안에는 가족 단위 손님들도 많았다.늦은 저녁을 즐기는 사람들, 천천히 산책하는 연인들, 가게 앞에서 가볍게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여기는 밤이 길구나."

이곳에서는 저녁 시간이 보통 8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그래서 일부 가게에서는 6시 반부터 8시까지 해피아워를 운영하며, 더 저렴한 가격에 음료를 제공하기도 한다고 했다.숙소 주변을 걸으며 내가 편하게 갈 수 있는 카페와 가벼운 맥주 한 잔을 할 만한 곳을 찾아봤다.


무조건 위험하다고 피하는 게 아니라, 내가 경험하고, 내가 판단하는 것.그게 더 중요하다고 느꼈다.앞으로 이곳에서도 조금씩 행동반경을 넓혀가야겠다고 생각했다.낮이든 밤이든, 이곳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이렇게, 둘째 날이 지나갔다.



하루의 마무리

오늘 하루는 예측하지 못한 변수들로 가득했다. 러닝을 하면서 새로운 공원을 탐색했고, 핸드폰 배터리가 방전되면서 길을 잃을 뻔했으며,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해결책을 찾아냈다. 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유명한 피자 가게에서 현지 음식을 경험하며 새로운 맛과 문화를 접했다.


낯선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한 여행과는 다르다. 예상했던 계획이 어긋나고, 순간적인 판단이 필요할 때가 많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이 쌓이면서 점점 더 이곳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두 번째 날이 이렇게 지나갔다. 이제는 이 도시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기분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10] 첫발을 내딛다, 새로운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