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디언의 성급한 부고

그는 왜 K-Culture Industry의 진화를 붕괴로 오독했을까?

2026년 새해, 번지수를 잘못 찾은 부고 기사

지난 2025년 12월 28일, 영국 일간지 가디언(The Guardian)은 '거의 붕괴 직전: 한국 영화 위기의 이면과 K-팝이 면역력을 잃은 이유('Almost collapsed': behind the Korean film crisis and why K-pop isn't immune)'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 보냈다.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25/dec/28/behind-crisis-korean-film-why-k-pop-isnt-immune


아쉽게도 이 글은 산업을 다루면서도 시장의 이면과 변화를 읽지 않았다. 문화현상을 논평하는 시각으로 문화 산업을 재단하고 평가를 했다. 어그로성 제목이야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편집인(editor)이 했겠지만, 산업 현장의 인터뷰 한 줄 없이 붕괴라는 표현을 쓰는 건 지나치게 도발적이다.


라파엘 라시드(Raphael Rashid)가 작성한 이 기사는 팬데믹 이전에 비해 절반 가까이 줄어든 한국 영화의 연간 개봉 편수와, 10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세로 돌아선 실물 앨범 판매량(2024년 기준 19.5% 감소)을 위기의 핵심 징후로 꼽았다. 특히 중소 기획사들이 제작비 상승 압박을 견디지 못해 무너지고 있으며, 한국 문화의 아이디어가 세계적으로 성공하더라도 정작 한국 기업들이 수익을 가져가지 못하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래서 ‘붕괴직전’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이 기사는 '수치의 하락'이란 겉은 읽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 작동하는 거대한 산업의 '체질 개선'과 '플랫폼 이동' 과정은 전혀 읽어내지 못했다. 런 글이 한국 시장을 잘 모르는 이들을 오독께하고, 심지어 가디언이라는 권위를 얻어 다시 한국에서 '오독의 공명(Resonance)' 현상을 발생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동안 그래왔고 이번에도 그랬다. 오늘도 어느 단톡방에는 이 기사를 공유하면서 한국 문화 산업의 위기를 안주삼아 이야기를 할게 뻔하다. 내가 들어가 있는 단톡방에서 이 기사를 얼마나 많이 봤는지 모를 지경이다.


그러니 정리를 좀 해야겠다.


일단 이 기사를 작성한 라파엘 라시드라는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다. 그는 그동안 한국의 높은 자살률, 치열한 경쟁 사회, 젠더 갈등 등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과 구조적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해 온 인물이다. 그의 이러한 사회학적 비평 역량은 분명 존중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분석하는 역량과는 별개라는 점이다. 아무리 규모가 얼마 안 되는 시장이라고 할지라도 이 땅엔 우리만의 고집스러운 시장 작동 방식이 있는 것이어서 그리 쉽게 재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본의 흐름이나 플랫폼 비즈니스 모델을 전문적으로 취재해 온 산업 전문가가 아니다. 그가 산업 전문가였다면 적어도 인터뷰에 그런 인물 한 두 명은 있기 마련인데,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의 기사는 영화와 음악 산업이 겪고 있는 복잡한 '상황을'을 한국 사회 특유의 '병리적 현상'이나 '실패'로 환원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앨범 판매량 감소'는 팩트일지 모르나, 그것을 'K-팝 전체의 몰락'으로 해석하는 문맥은 비산업적이다. 전문성이 결여된 관찰자가 내린 성급한 사망 선고는 그래서 위험하다.


영화 산업의 구조적 오독

가디언은 한국 배급사들이 연간 개봉 영화 편수를 대폭 줄였다는 데이터를 근거로 K-시네마의 창의성이 고갈되었다고 주장하고 한류의 한축이었던 K-Movie가 몰락할 것이라고 진단한다. 기생충의 한국이 더 이상 만들어질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산업적 의미의 한류 스토리에 한국 영화는 없다. 적어도 K-팝에 견줄 수 있는 산업이 아니다. 물론 서구 시장에서 'K-무비'라는 브랜드로 봉준호, 박찬욱, 이창동으로 대표되는 작가주의 영화들이 소비되고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긴 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어느 남미의 감독 영화를 소비하는 것과 같다. 개인의 위상은 커졌겠지만 산업적 성과는 아니다.

그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할리우드 문법을 파괴하는 독창적인 '아트 하우스' 영화의 거장으로 소비되었을 뿐이다. 이걸 글로벌에서 각광받는 한류 산업이라고 칭하는 건 무리다.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고 한국 문학 산업이 번성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즉, 각종 영화제에서 인기 있는 비평적 관점의 한국 영화는 글로벌 시장에서 환대를 받았을지언정, 산업적 관점의 한국 영화는 그렇지 못했다. 한국 영화의 매출액 구조 중 글로벌 시장의 수익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보면 한국 영화가 글로벌 시장에서 각광받았다는 주장을 감히 하지 못한다.


냉정하게 말해 봉준호와 박찬욱은 한국 내수 시장에서 김한민만큼의 압도적인 티켓 파워를 가진 감독은 아니었다.

반면에 지난 20여 년간 한국 영화 산업의 허리를 지탱하며 현금창출원 역할을 해온 것은 김한민 감독의 <명량>이나 <한산>,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 시리즈 같은 기획형 상업영화들이다. 이들은 철저히 내수 시장의 정서와 흥행 공식에 충실한 블록버스터 상품이다. 이들 영화에 서구 시장은 조명하지 않았다.


현재 한국 영화계가 겪고 있는 진통은 팬데믹과 OTT의 부상, 그리고 티켓값 인상 등 극장에 가지 않아도 되는 핑곗거리가 쌓이면서 극장 관람객의 감소가 이어지고, 이로 인해서 영화 자체가 수익성이 떨어지는 사업 영역으로 간주되기 시작한 탓이 크다. 여전히 국가에서 지원하는 독립영화는 시장에 출현하고, 이들 독립 영화들이 세계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고 있지만, 2억 명이 넘던 극장 관람객수가 반토막이 나면서 벌어진 일이다. 달리 말하면 '내수용 양산형 상업영화'가 경쟁력을 잃고 도태되는 과정일 뿐이다. 더구나 중간 규모 예산의 영화가 적어지고 있다는 건 비단 한국만의 현상도 아니다.


이 조차도 산업의 구조조정일 뿐이다. 봉준호와 박찬욱으로 대변되는 한국 영화의 브랜드 가치가 훼손된 것이 아니다. 내수 시장의 상업적 거품이 꺼지는 현상을 두고 한국 영화 전체의 예술적 동력이 멈췄다고 진단하고 한류의 축 중 하나가 무너지고 있다는 식으로 평가하는 건 무리다. 박찬욱의 <어쩔수가 없다>는 글로벌 투자는 받지 못했을 지언정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소식을 알리고 있지 않은가? <미키 17>으로 자존심이 상했을 지언정 봉준호는 여전히 새로운 시도로 밤을 지새우고 있는 중이다. 제작비를 회수할 수 없는 상업 작품이 감소하는 것은 제작비를 회수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언제든지 복원되는 것이기에 일희일비할 문제가 아니다.


2024년과 2025년을 지나면서 한국 영화는 국내 영화 시장의 규모에 맞게 다시 최적화되는 과정을 밟고 있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2025년 하반기 우리는 극장을 외면했다고 하는 2030이 돌아오고, 티켓값이 비싸다고 했던 이들이 IMAX 등 특별관 예약을 못할 정도로 붐비는 현상을 보면서 또 다른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도 잊지 말았으면 한다.


그나마 영화 시장에 대해서는 그럴 수 있다. 연간 기준 1억 600만 명이란 숫자가 주는 공포감은 우리조차도 극장의 위기와 영화의 위기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한국에 사는 외국 저널리스트라고 어쩔 수 없을 듯싶다. 그러나 음악 시장은 다르다.


K-팝의 고도화: 앨범 판매량 감소는 '위기'가 아니라 '정상화'다

가디언의 무지는 K-팝을 분석할 때 더욱 극적이다. 기사는 앨범 판매량이 감소하고 중소 기획사들이 위기에 처했다는 점을 들어 K-팝이 '확장성의 한계'에 봉착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는 앨범 판매량 수치 뒤에 숨겨진 시장의 역학을 이해하지 못했다. 시장의 성숙되고 발전하면 중소 사업자는 줄어들고 대형 사업자의 레이블 형태로 진화하는 것은 전 세계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겪어온 공통적인 현상이다. 거대 플랫폼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단위당 투입 비용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반적인 현상을 두고 확장성의 한계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더더욱 동의하기 힘들다. 먼저 앨범 판매량 감소부터 보자. 분명 앨범 판매량이 감소한 건 분명하다. 일단 이 지점을 분명히 하자. 전 세계에서 앨범 판매량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가 한국이다. 스트리밍으로 넘어간 시장에서 더 이상 앨범은 그 실효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팬덤의 기원인 한국에서는 앨범 판매량이 압도적으로 높은 상황이다. 조금 과하게 이야기하면 한국 아티스트들의 총 앨범 판매량의 50%를 국내에서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거기에 팬데믹이란 특수 상황이 덧붙여졌다. 지난 몇 년간 판매량 폭증을 견인했던 것은 중국 팬덤의 막대한 공동구매(공구) 물량이었다.


한한령 등으로 한국 아티스트들의 중국 진출이 무산된 상황에서 중국 팬들이 포토카드 등이 포함된 앨범 구매에 적극적으로 나선 탓이다. 그런데 최근 중국 내 경제 둔화와 규제 강화로 이 '허수'가 빠지면서 수치가 조정되었을 뿐이다. 더구나 민희진 사건이 터지면서 랭킹 상승을 위해서 팬들이 조직적으로 앨범을 구매하는 등의 행위에 대한 비판도 한 몫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앨범 판매량 감소를 스트리밍 시대에 부합하는, 팬데믹 기간에 형성된 비정상적인 '거품'이 꺼지는 정상화(Normalization) 과정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실제 글로벌 팬덤의 규모나 영향력이 줄어든 것이 아니다. 오히려 특정 국가 자본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며 기획사들은 수익 다변화와 진출 국가 확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덕분에 산업 구조는 더 건전해졌다.


팬덤의 소비 행태가 바뀌었다는 것도 산업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팬들의 소비 축이 '소유'에서 '경험'으로 이동했다. 팬데믹 기간에는 콘서트가 불가능했기에 팬들의 '보복 소비'가 실물 앨범 구매로 쏠렸다. 하지만 엔데믹 이후 월드 투어가 재개되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팬들은 이제 앨범 수십 장을 사서 쌓아두는 대신, 비싼 티켓을 구매해 콘서트장으로 향하고 있다. 팬덤의 지갑이 닫힌 게 아니라, 돈이 쓰이는 곳이 플라스틱 CD에서 공연이라는 '고부가가치 경험재'로 옮겨간 것이다. 여기에 전 지구적인 친환경 트렌드에 발맞춰 불필요한 중복 구매를 자제하는 자정 작용까지 더해졌다. 가디언은 이를 두고 '인기 하락'이라 오진했지만, 실상은 군살을 빼고 근육을 키우는 '건강한 다이어트' 중인 셈이다. 공연수익은 매년 갱신되고 있고, 아티스트들의 수명도 연장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를 두고 K팝 시장의 위기라고 이야기하면 섭섭하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중소 기획사의 도태는 산업 성숙기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실리콘밸리에서 경쟁력 없는 스타트업이 문을 닫는다고 IT 산업이 망했다고 하지 않듯, K-팝 역시 자본과 기획력을 갖춘 상위 레이블 위주로 재편되며 고도화되고 있다. 더구나 팬덤 중심의 마켓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 K팝의 대중성이 무너지고 있다는 평가는 기우를 넘어서 사업 전략을 도외시한 분석이다.


현재 글로벌 시장에서 압도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스트레이 키즈(Stray Kids)'는 특정 장르에 집중하면서 글로벌 팬덤을 창출하고, 이를 통해 점진적으로 대중성을 확보해 왔다.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팬덤 사업화를 글로벌 시장에서도 구현해 낸 대표적인 케이스다. 이 성공 이후 한국의 기획사들은 보편적 대중성을 소구 하면서 한국 팬덤을 우선시하던 전략에서, 목적성을 가지면서 글로벌 팬덤을 겨냥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는 중이다. 즉 K-팝은 이미 레거시 미디어 없이 코어 팬덤을 먼저 구축하고 이를 통해 대중성을 획득하는 '바텀업(Bottom-up)' 방식의 새로운 성장 표준을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두고 팬덤 기반의 사업이 가지는 한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시장의 성장 문법의 변화를 지나치게 도외시한 것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가디언이 위기라고 지적한 이 지점들은 사실 K-팝이 불황을 뚫고 더 단단해지는 과정이다. 그렇게 시장의 변화에 맞게 최적화 단계를 밟아가는 과정이 한국 K-팝이다.


1964년의 데자뷔: 비틀즈는 소음이 아니라 신호탄이었다


더욱 자극적인 것은 Kpop Demon Hunters 효과에 대한 해석이다. 서구도 할 수 있는 Kpop이기에 이제 한국의 독창성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그런 식이라면 애당초 브리티시 팝은 사라졌어야 했다.

1964년 비틀즈가 미국 시장에 상륙했을 때, 당시 타임과 뉴스위크를 비롯한 미국 주류 언론들은 비틀즈를 "음악적 재앙", "머리 긴 소음", "곧 사라질 10대들의 히스테리"라고 혹평했다. 그들은 '비틀 마니아'라는 현상의 이면에 있는 문화적 혁명과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애써 무시했다.


이 지점에서 서구 언론이 간과한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이 있다. 1960년대 중반, 비틀즈가 미국을 강타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 방송국과 자본은 철저한 기획 하에 '미국판 비틀즈'를 만들어냈다. 오디션을 통해 선발되고 TV 시트콤을 통해 마케팅된 밴드, 바로 '몽키스(The Monkees)'다. 상업적 성과만 놓고 보면 몽키스는 비틀즈를 압도할 기세였다. 1967년 한 해 동안 몽키스가 팔아치운 앨범 판매량은 당대 최고의 아이콘이었던 비틀즈와 롤링스톤즈의 판매량을 합친 것보다 많았고, 데뷔 앨범부터 4장의 앨범이 연속으로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하며 무려 31주간 정상에 머무르는 기염을 토했다.

미국 자본이 영국 스타일을 차용해 만든 이 거대한 '복제품'의 성공은 과연 원조인 브리티시 팝의 종말을 의미했을까? 결과는 정반대였다. 몽키스의 성공은 영국 팝(British Pop)이 일시적인 침공을 넘어, 미국 시장에서도 통용되는 완벽한 '표준 장르'로 정착했음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미국 대중들이 몽키스에 열광한 것은 그들이 미국인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구사하는 음악과 스타일이 당시 가장 힙했던 '비틀즈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복제품의 범람은 원조의 아우라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장르의 파이를 키우고 원조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현재가 과거와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항상 변수는 있다. 그러나 확률적으로 지금 미국과 일본이 K-팝 시스템을 차용해 현지 그룹을 만드는 흐름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K-팝의 독창성이 희석되는 위기가 아니라, K-팝이 단순한 지역 음악을 넘어 전 세계가 공유하는 '제작 표준(Production Standard)'이 되었음을 말이다. 몽키스가 비틀즈를 대체하지 못하고 오히려 비틀즈 시대를 공고히 했듯, 시스템이 확산될수록 '원조'가 가진 아우라와 정통성은 오히려 강화된다.


실제로 비틀즈 이후 영국 팝은 미국 시장에서 번성했다. 오히려 비틀즈가 연 문을 타고 레드 제펠린(Led Zeppelin),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퀸(Queen) 같은 거장들이 1970년대 미국 스타디움을 점령했다. 1980년대에는 듀란 듀란(Duran Duran), 더 폴리스(The Police) 등이 주도한 '제2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으로 빌보드 차트 상위권의 절반을 영국 음악이 채우기도 했다. 이후 오아시스(Oasis), 콜드플레이(Coldplay), 아델(Adele)에 이르기까지 영국 팝은 미국 시장의 '이방인'이 아니라 확고한 '주류(Mainstream)'로 뿌리내렸다. '침공'은 성공하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 시장의 일부가 되어 영원히 남는 법이다.


2026년 현재, K-컬처를 바라보는 가디언의 시선은 산업을 읽고 분석하는 눈이 아니다. 지금 K-팝이 겪는 수치적 조정은 붕괴가 아니라, 단순한 유행을 넘어 하나의 견고한 장르이자 문화로 정착하는 과정에서 겪는 필연적인 성장통이다. 가디언이 말하는 위기는 사실 K-팝이 신기한 유행 상품에서 고전으로 넘어가는 문턱을 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가디언의 기사는 한국 문화 산업에 대한 애정이 없다. 애정 없는 글을 언제까지 봐야 하는 것이고, 이런 글에 일희일비를 해야 할까? 영화나 드라마는 힘들게 힘들게 시장을 돌파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 이를 부인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 속의 사람들은 오늘도 최선을 다해서 주저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기에 애정 없이 붕괴를 논하는 자들을 걷어내야 한다. 그것이 물 건너온 것이든, 이 땅의 것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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