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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신 Apr 01. 2016

호핀(hoppin), 그 찬란한 소멸

- 변화를 이해하는 방식

2016년 3월 31일, 호핀이 마지막 호흡을 했다.

2016년 4월 1일, 호핀은 사라졌다.

사라진 날이 하필 '만우절'이라 더 애처롭다.


한국 미디어 역사에서 한 자락을 차지했던 호핀이었지만, 그 영광의 순간은 짧았고, 회한은 깊게 남았다.

호핀은 2011년 1월에 시작했다. 전용 단말기에서 처음 시작한 서비스였지만, 이내 단말기는 접었다. 그리고 SKT에서 제공하는 범용 OTT 서비스로 자신을 자리매김했다.


지상파 정액제를 최초로 도입한 OTT 서비스였고, 키즈 정액관을 전면에 내세운 OTT 서비스였다. 예약 다운로드와 같은 신서비스를 선보이기도 했었다. 별도의 기술팀을 운영하면서 UI 등에서도 탁월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었다. 그러나 2016년 4월 1일 현재, 그 모든 것은 과거가 되어 버렸다. 이 작은 기억이라도 남겨 두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면에서 호핀은 의미를 가진다.


우선 호핀은 VOD 전용 서비스였고 국내 유일의 True N-Screen 서비스였다.


티빙 등 여타 다른 OTT 서비스들은 실시간을 기본으로 제공해서 사람들을 모은 뒤, 이들을 대상으로 VOD를 제공하는 서비스 전략을 택했었다. VOD 전용 서비스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지상파 등의 견제에서 자유로웠다. 사실상 넷플릭스 도입 이전에 완벽한 N-Screen 서비스를 제공하던 국내 유일의 서비스일 수 있었다. 물론 실시간의 유혹은 강했고, 마지막 순간에도 혹시 '실시간'을 제공한다면 성과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호핀은 절멸의 순간까지 순수 VOD서비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사람으로 치자면 번민을 하긴 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지조를 지킨 선비라고나 할까.


티빙 등은 실시간이 발목을 잡아서 TV 시장에 진입하는 것이 까다로웠지만, 호핀은 스마트 TV에 앱을 설치할 수 있었다. 물론 티빙 등도 삼성 스마트 TV에 앱을 제공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실시간이 제외되고, VOD만 제공했다. 모바일 등의 서비스와 스마트 TV의 앱이 달랐다. POOQ도 마찬가지다. POOQ 역시 TV에서는 실시간은 제외됐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스크린에서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한 건 호핀이 유일하다.


TV에서 더 이상 앱을 개발하지 않고 크롬 캐스트를 연동형 서비스로 제공했을 때도 VOD 전용 서비스의 장점이 작용했다. 티빙이 크롬캐스트에 실시간 방송을 제외했던 것과는 달리 호핀은 VOD 전용 서비스라서 그런 제약이 없었다. 그렇게 넷플릭스가 국내 시장에 진입하기 이전에 유일하게 N-Screen 서비스를 온전히 제공했던 서비스는 호핀이 유일했다.


http://news.samsung.com/kr/%EC%82%BC%EC%84%B1-%EC%8A%A4%EB%A7%88%ED%8A%B8tv%EC%9A%A9-%ED%98%B8%ED%95


상대적으로 호핀은 청정 미디어였다.


OTT 서비스는 대부분 수익이 박했다. 실시간을 제공하지 않고 VOD만을 제공하는 사업자이긴 하지만, VOD에도 MG(Minimun Guarantee)를 제공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콘텐츠 사업자와의 거래에서 우위를 점할 수 없었던 소수 미디어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수익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성인물은 유혹이었다.


당시 호핀의 임성희 팀장과 성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선명하다. 수익 문제 때문에 성인물을 도입하는 것이 어떨지 술을 빌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그 경제적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나였지만,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 주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의 발언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말이야 흘러가는 이야기였겠지만, 그렇게 호핀은 상당기간 성인물을 피해왔다. 2015년 5월에 사랑 애를 쓰는 애로관을 열긴 했지만, 그 애로관의 수위도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다. 메뉴바 등에 애로관을 노출시키지 않았고, 단지 애로 서비스에 가입된 사람들만 찾아서 들어가는 구조로 만들었다(2016. 4.2 추가). 티빙 등 다른 사업자들이 손쉽게 성인물을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한 것과는 달랐다.


내 발언 때문에 호핀이 성인물을 택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족과 편안하게 쓸 수 있는 영상 어플을 만들고 싶다던 임성희 팀장의 바람이 그렇게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고, 그걸 호핀팀이 어렵지만 같이 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호핀은 키즈관을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OTT 사업자였다. 그럼에도 가끔 성인물을 일찍 개방했더라면 호핀이 지금 안락사당하는 꼴은 당하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다.


호핀은 국내에서 제공된 영상 어플 중 가장 직관적인 UI를 가진 서비스였다.


호핀은 여러 차례의 업그레이를 거치면서 UI에 개선에 최선을 다한 사업자 중 하나였다. 티빙과 실시간과 VOD의 위계 문제, 다양한 실시간 방송의 위치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UI가 산만하고 복잡했고, Pooq은 지상파 3사의 파워 게임 때문에 UI를 정돈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호핀은 VOD 전용 서비스였고, 단일 사업자가 추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면에서 UI 정돈이 상대적으로 용이했다. 영화/TV/해외, 애니/키즈 이용권으로 구분된 상단 선택 바(bar)를 중심으로 '최근'을 전면에 내세우고, 사이드바를 통해서 개별 서비스의 하부 목록으로 들어가는 구조를 만들었다.


흔히 사람들이 영상물을 구별하는 방식을 그대로 택했고, 이를 서비스에 적용함으로써 가장 직관적인 UI를 갖춘 것이다. 그래서 사용 편의성이 높았던 서비스다. 한두 번의 손길만으로 자기가 원하는 콘텐츠를 찾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했었다.


그러나 이런 선도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 의미 있는 성장을 이루지는 못했다. 실시간을 거의 무료로 제공하는 bTV 모바일 등 경쟁 서비스가 등장하면서 호핀의 탄력은 잃어갔다. 단순 가입자의 숫자는 증가했지만, 콘텐츠를 정기적으로 유료로 구매하는 가입자의 규모는 형편없었고, 그 규모 조차도 일정 시간이 흐른 뒤에는 성장을 멈추었다. 그리고 3월 31일 그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무엇이 잘못이었을까? 초기에 호핀 단말기로 인한 폐해가 너무 컸다. 누적 적자를 안고 가야 하는 사업의 특성상 초기 단말기 구축 비용은 지난 몇 년 동안 호핀이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할 때마다 걸림돌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니 어쩌면 지상파 등 가장 강력한 콘텐츠를 초기부터 수급했기 때문에 플랫폼 사업자의 지배력을 확보하지 못한 탓일 수도 있겠다 싶다. 넷플릭스가 오리지널 콘텐츠를 비롯해서 비교적 최신의 상품을 제공하기 시작한 것은 넷플릭스의 역사로 보면 최근의 일이다. 그 이전에 넷플릭스는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저렴한 콘텐츠를 수급 제공하면서 플랫폼 사업자의 지배력을 유지해 왔다. 그렇게 넷플릭스는 플랫폼 사업자로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호핀 등 국내 OTT 사업자는 처음부터 콘텐츠 사업자에게 무릎을 너무 일찍 꿇어버린 건 아닐까? 이 모든 이야기는 지나버린 일에 대한 회한이요 아쉬움 일 뿐이다.


지난 시절 동안 국내 미디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서비스 중 하나였던 호핀이 사라졌다.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한 서비스였기에 그 기억을 간직하고 아쉬움을 나눌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적어도 미디어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호핀의 성장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호핀을 위해서 노력해 주신 임성희 팀장, 홍제희 팀장을 포함해서 모든 호핀 팀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그분들과 함께 호핀을 기억하는 여기 한 사람이 있다는 걸을 말씀드리고 싶다.


호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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