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잠깐 쉬어가는 길
이상한 나라에 와있다.
문을 열자마자 좋은 향과 훈기가 몸을 덮치고 세련된 조명과 거울들로 눈이 부시다. 조그맣고 곰팡이 핀 동생의 자취방도, 직접 한 페인트칠로 얼룩덜룩한 시골집도 아닌 여기는
엄마가 사는 곳이다.
엄마의 집.
곳곳에 화분이며 인형이 보기 좋게 장식되어 있다. 밝은 색 벽지, 공들인 인테리어, 엄마의 취향이 듬뿍 들어간 소품들. 한쪽에는 작업실처럼 널찍한 책상에 데스크톱, 프린터기까지 구비해 놓았다. 머리카락 한 올 떨어져 있지 않은 바닥과 잡지 사진처럼 정갈한 풍경에 나는 당황한다. 낡은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올라와서 번호키를 누르는 순간 다른 세상에 떨어진 기분이다. 사람 손때 없이 보기 좋으라고 꾸며둔 것만 같은 곳에 엄마가 산다. 그렇구나, 엄마는 원래 이렇게 살고 싶은 사람이었구나. 엄마가 엄마를 똑 닮은 집에서 깨끗하고 편안하고 향기롭게 살고 있다.
엄마의 집.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겨울 산에서 지푸라기와 마른 나무를 주워와 아궁이를 땠다. 아빠가 태어난 소나무골 언덕 집은 세 시간 내내 장작을 팔팔 태워야 방이 덥혀진다. 매 겨울마다 나서서 부엌데기를 자청했던 아빠에게 무안해졌다. 충분히 화기가 오르려면 불 앞을 눈 한번 떼지 않고 지켜야 한다는 것을 직접 해보기 전까지는 까맣게 몰랐다. 엄마의 성화로 가스와 온수를 설치하기 전까지 한겨울 방문은 엄두도 못 냈던 곳이다. 여름이면 박쥐 똥이 마루를 더럽히고 매일밤 모기장으로 해충과 전쟁을 치렀던 소나무 숲 작은 집. 고라니 흔적을 따라가면 증조부모와 친할아버지가 누워있는 봉분이 있는 곳. 소박하고 조용한 이곳은 동생의 집이다. 세 칸 방 중에 두 칸이 전부 동생이 수집한 온갖 장르의 책들로 채워져 있는,
동생의 집.
퇴사하고 처음 몸을 비빈 곳은 막 귀농한 아빠의 집이었다. 쓰지 않는 방이 두 칸이나 남아돌고 터무니없이 크기만 한 농가 주택에 아빠 혼자 산다. 이곳에서 나는 한량처럼 지냈다. 내킬 때까지 늦잠을 자다가 부스스 눈을 뜨면 마당으로 나가서 아빠가 뽑아놓은 배추를 거위 밥으로 던져주는 게 하루의 시작이었다. 청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은 비닐하우스를 지나면 울타리로 만든 개장이 나온다. 며칠 전 검둥개가 새끼 네 마리를 낳아 갑작스레 복닥복닥해진 참이다.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눈도 뜨지 못했던 놈들이 이제는 집 밖으로도 돌아다닌다. 그렇게 손바닥만 한 강아지를 어르며 놀다가 좀 춥다 싶으면 뜨끈한 전기장판에 몸을 지진다. 아빠의 퇴근 즈음엔 아빠 이부자리에 전기요를 틀어놓고 아빠가 좋아하는 차를 한번 끓인다. 시골은 이불에서 나오기만 하면 늘 무언가 할 일이 있다. 아빠가 끓여놓은 묵은지찌개와 쌀밥을 데워놓는 것이나, 어미개를 아빠의 트럭에 치이지 않게 묶어놓는 것이나. 아빠가 좋아하는 라디오를 틀어놓거나, 오늘 밥상머리에서 무슨 얘기를 할까 생각한다던가. 아빠의 퇴근시간이 하루 중 내가 가장 부지런한 시간이다. 퇴근 전에는 꼭 전화가 한 번씩 온다.
"해인이 오늘 뭐 먹고 싶어?"
가스불 위에 찌개가 보글거린다. 아빠의 이런 전화, 이런 목소리면 벌써 따끈하게 배가 부르다.
"김치찌개가 한 사발 가득 있어요, 아빠."
아빠가 킬킬 웃는다. 정말? 정말 아무것도 안 사가도 돼? 나는 덧붙인다.
"아, 근데 맥주가 한 캔밖에 안 남았어요. 복분자도 어제 다 먹었는데."
퇴근 후 아빠의 일과는 내가 묶어둔 어미개를 풀어주는 것이다. 주변에 농사 차량이 그렇게 많은데 아빠는 개들을 묶어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애들이 치여 죽을까 걱정하는 것은 항상 나와 동생 몫이다.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은 검둥개는 총명한 갈색 눈을 반짝거리며 집 안까지 들어와 간식을 조른다. 온갖 군데를 밟고 다닌 흙발의 강아지를 아빠와 나는 안고 뽀뽀하고 부둥거린다.
"우리 세돌이 새끼 키우느라 고생한다. 고생해."
아빠의 집은 홀아비 냄새가 난다. 아무리 빨아도 흙 자국이 지지 않는 수건. 밖에서 개와 거위와 뒹군 차림 그대로 덮는 이불. 운동화 뒤축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진흙. 탁상 위에 뽀얗게 쌓인 먼지. 정리되지 않은 냉장고.
세상 무엇보다 내 마음을 편하게 한다. 가볍게 뛰어서 십 분 거리에 너른 방파제 항이 있는,
바다도 흙도 가까운 아빠의 집.
아빠의 집.
어릴 적에 살았던 집은 뒤켠에 사슴과 닭들이 돌아다니는 철장이 있었다. 아침마다 닭장에서 갓 낳은 달걀을 꺼내오는 게 내 일이었다. 내가 가져온 달걀, 암탉의 온기가 남아있는 달걀을 톡 깨서 날것으로 후루룩 먹으면 하루가 시작된다. 돌이켜 생각하면 우리가 살던 나무로 만든 그 집은 깨끗할 날이 없었다. 사람은 넷이요, 그중 둘은 어린애에 정리와는 담을 쌓은 아빠가 있으니 치우는 사람이 엄마 하나뿐인 방 세 칸짜리 집이 멀끔할 리가. 나는 어수선한 우리 집이 좋았다. 식탁보가 흐트러지고 소파 쿠션이 굴러 떨어진 우리 집. 사람이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그런 집.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엄마는 그 집에서 사는 게 정말 힘들었겠구나, 하고.
아빠의 집에는 온갖 것이 있다. 주워온 안마기, 구멍 난 양말, 못쓰는 자전거. 할머니가 직접 캤다는 밤톨만 한 고구마와 내가 사다준 유통기한 지난 약병까지. 나는 그런 흔적들을 좋아한다. 아빠는 때까치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걸 긁어모은다. 아빠의 둥지를 취향대로 꾸미고 그 안에서 삶을 살아간다. 그렇다고 그 잡동사니를 아끼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라서, 어쩌다 한번 부리는 변덕에 홀라당 불 태워지기 일쑤다. 그럴 때의 아빠는 내가 좋아하는 것도 동생이 좋아하는 것도 미련 없이 태워버린다. 아빠의 그런 성격을 안 후로 우리는 우리의 보물을 각자의 집에 숨겨놓는다. 아빠의 집은 어수선하고 냉랭하지만 사랑스럽다. 곳곳에 웃을 거리들이 숨어있다. 먼지를 한참 걷어내야 보이긴 하지만.
지금도 나는 엄마의 오리털 이불 위다. 계절감 안타는 메밀베개를 주워다 쓰던 아빠네 집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자동으로 작동되는 공기청정기. 가지런히 놓인 손님용 슬리퍼. 녹색 등이 나오는 침대 스탠드와 해변향 캔들 워머까지 여기는 너무나 다른 세계 같다. 아빠집에선 소변이 마려우면 벌벌 떨며 뒷간으로 나가 얼음 같은 변기에 잔뜩 긴장한 궁둥이를 대야 했는데 여기는 샤워부스에 샤워기가 종류별로 달렸다. 작은 와인바도 있고 크리스마스 장식도 있다. 어쩌면 이렇게 손바닥만 한 집을 아기자기 이쁘장하게 손 볼 생각을 했는지. 생각해보면 엄마는 예전부터 귀여운 것들을 좋아했다. 통일성 있는 가구와 벽지를, 멋들어진 건물과 인테리어를 좋아했다. 엄마가 원하는 만큼 차려놓고 살 수 없었던 건 아빠와 우리가 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지금 혼자가 된 엄마는 좋아 보인다. 너무나 엄마 같은 공간. 같이 살 때는 엄마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핀잔했던 공간. 공주님의 작은 성 같은 공간.
엄마의 집.
나에게는 커다란 비닐하우스 앞에 트럭 한 대를 세워 놓는 아빠가 있고 지프차를 몰며 분홍색 아파트 7층에 사는 엄마가 있다. 어떻게 이런 사람 둘이 살아서 내가 태어났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내일이면 세탁기가 건조까지 해주는 이 집을 떠나 아빠의 바닷가 집으로 간다. 그사이에 성큼 자라 있을 네 마리 강아지들을 상상한다. 마지막에 안아 들었을 때 코앞에서 풍기던 젖 냄새도.
나는 아직도 이상한 나라에 있다. 절대로 닿을 수 없는 두 개의 세상을 왔다 갔다 하는 모험을 하면서.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엄마와 아빠의 자식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외교는 이미 끝난 건지도 모른다. 인형의 집 같은 이곳이 그리워질까. 아직은 알 수 없다. 아빠의 집을 그리워만 한 시간이 너무 길었으니 그 여유를 한껏 즐기고 싶다. 엄마가 이런 곳에서 살고 있는 줄도 몰랐던 나는 이 매무새에, 결벽에, 완벽에 낯을 가린다. 맥주 한 방울이 소파에 묻을까, 주방 테이블에 치킨 기름이 배일까. 이 흠 없는 공간에 역한 내를 남기고 갈까 봐 눈치를 본다. 나도 동생도 아빠도 없는 곳에 혼자 만든 엄마의 둥지는 범접하기 힘들다.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 멋대로 나를 안락하고 우쭐하게 만든다. 이상한 나라, 이상한 곳. 그리고 이 사이에서 제일 이상한 것은 모험이랍시고 이 상황을 신나게 즐기고 있는 나 자신이다. 내 가족의 기이함을, 엄마와 아빠의 하늘과 땅 같은 괴리를 관찰하며 즐기고 있다. 분방하다 못해 초라하게까지 보이는 아빠의 집과 정돈되다 못해 부자연스럽기까지 한 엄마의 집. 이만큼 써놓고서도 어느 쪽이 더 좋은 걸까 저울질을 한다. 하지만 어느 쪽을 고르던 나와는 크게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엄마가 엄마의 인생을, 아빠가 아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나는 언제나 손님이다. 어디로 가기를 선택하는 엄마와 아빠가 있는 그곳에서 나는 그저 잠시 머물다 가는 객일 뿐이다. 나를 신경 쓰지 않는 엄마와 아빠의 공간에 들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이만큼 또렷하게 날 만든 사람들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나. 엄마와 아빠가 처음이었던 사람들이 내 존재를 이유로 초인적인 힘을 갖게 되었다가 이제는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인생이라는 길을 거닐고 있다. 자유로워 보이고, 이전보다 홀가분해 보인다. 엄마와 아빠가 행복할 수 있는 자리에서 온 힘을 다해 행복해지기를 기도한다. 이상한 나라에, 내가 모르던 나라에 얼마든지 더 손님으로 맞아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