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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Apr 03. 2022

아직 글을 씁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

벌써 꽃이 피는 계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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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글을 써보려니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글을 쓰는 분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뭐 하나 제대로 써내지도 못하고 달포가 지났어요. 잘 지내고 계신가요? 어딘가에서 열심히 살고 계시겠지요?



저는 오늘  정부를 맞이하는 기분으로 온갖 검진을 받고 왔습니다. 피를 뽑고, 무게를 재고, 흉부 사진을 찍으며 하얀 방을  군데나 돌았는지 모릅니다. 가장 끔찍한 것은 자궁경부암 검사였습니다.  트인 곳에 다리를 활짝 벌리고 앉는 것은 그렇다 쳐도,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도구로 아래를 푹푹 쑤시며 돌려대는  느낌은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습니다. 힘을 빼야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의사를 두고 훅훅 숨을 쉬는데 짜증이  올라오는 겁니다. 바이킹도   있고 치과도 혼자 다니는데 질구를 파고드는 쇠붙이를 주사보다 싫어하는 어른이 되었다니요. 매번 검사를 끝내고 마음이 너덜해진 채로 된욕을 뇌까리며 자궁암으로 죽는 한이 있어도  의자에는   다시 앉지 않으리라 다짐하다가도    지나면 오늘처럼 멍청하게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네네,, 하고 앞이 트인 치마를 입고 검사실로 들어가는 거지요. 남성들도 요도암 검사를 할까요?  사람도 고추만 내놓게 동그랗앞이 뚫린 바지를 입고 동성의 의사 선생님 앞에 서있을까요? 요도구를 찌르는 검사에 누군가는 힘을  빼서 수월하고 누군가는 버둥거리며 아파할까요? 검사 결과가 기대되지는 않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며   하나 챙기겠다고 병원까지 갔다 온 것도 우스워서요.​


구강 검진을  의사가 충치는 없지만 스케일링을 하는  좋겠다기에 내친김에 치과까지 와버렸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치과의 대기 의자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두들기고 있는 겁니다. 예약 시간이 사십  정도 지났지만  환자의 진료가 끝나지 않아 소음 같은 뉴스를 들으며 오전에 했던 자궁경부암 검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달이 넘게 매일 밤을 무슨 글을 쓸까 고민하며 잠들었는데 정작  문장을 끄적인 것이 진료를 기다리는 치과 안이라니. 세상  모를 일입니다. 그것도 순서가 사십 분이나 뒤로 밀리지 않았으면 위이잉 칙칙하는 스케일링이나 받고 삼천 원짜리 페트 맥주를 사서 집에 갔을 텐데요.


글을 씁니다. 이제 손안에 핸드폰만 있으면 글을 쓸 수 있는 시대니까요.



빈하지만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프리랜서다 뭐다 해도 역병의 기세에 눌려 백수나 다름없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도 없고 일도 없어 일주일에 한 번 현관 밖을 나갈까 말까 하니 누구보다 안전한 것은 덤입니다. 집에 있을 때 동생 먹을 반찬을 만들어두는 것도 퍽 즐거운 소일거리입니다. 그렇게 하면 동생이 적당히 월세에서 노동비를 감면해주거든요. 고양이의 똥을 치우고 카샤카샤를 해주는 것도 포함입니다. 이렇게 가사 노동으로 가계를 메꾸며 벌이 없이 한 달 한 달을 넘기고 있습니다. 이 나이에 이 꼴을 하고도 아직 살아있는 게 어디람, 같은 생각을 하면 그래도 스스로가 조금은 기특해져요.



최근 가장 가슴이 뛰었던 일은(문자 그대로, 심장이 쿵쿵쿵쿵 뛰었던 일은), 언니가 저에게 수영복 차림의 사진을 보내준 것이었습니다.  달에    안부를 묻는데, 선거다 독서다 정신 놓고 지냈더니 언니에게서 먼저 연락이  거였어요. 사진을 열자마자 부끄러운 장면을 보고 코피가 터지는 만화의 연출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얼굴에 열이  몰리며  안쪽이 화끈화끈해지더라고요. 싱가포르 관광지의 눈부신 해변, 빨간 돗자리에 빨간 도트 비키니를 입은 언니가 아이스크림을 들고 웃고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찍은 건지 당당하고 편안한 눈길로 카메라를 봅니다. 지금도  심장의 반쪽은 언니의 눈동자 안에 두고   같습니다. 이제 그만하고 싶은데  이상 빨개질  없을 만큼 익어버린 거울  얼굴을 보면 나는 이미 완전히 망해버렸구나 싶습니다. 언니를 사랑합니다. 여전히 사랑합니다. 레오가 요즘 들어 부쩍 데이트와 선물 사진을 자랑하는 통에 속이 뒤집히긴 하지만 행복한 언니의 얼굴을 보면 금방 진정이 됩니다. 지난겨울 언니가 한국에 왔을 , 언니는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싱가포르에 있을 때의 내가 얼마나 날이  있었으면, 얼마나  가게를 싫어했으면 언니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언니를 좋아했을까요. 여섯 달의 시간이 지나, 한국에서 언니를 다시 만난 나는 놀라울 만큼 마음이 그대로라 이상한 기분이었습니다. 가슴이 떨려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언니의 미소 앞에서 앵무새처럼 아름답다는 말만 중얼거리는 . 언니가 앞에 앉아있는데도 보고 싶다는 말을 자꾸 내뱉는 . 전부 그때와 똑같습니다. 언니를 사랑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요. 삼일 밤을 같이 보내고 나서야 언니의 어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야기는 모두 보물 같았습니다. 언니를  소중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사랑에 둘도 없는 확신이 들게 했습니다. 내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금광에서 쏟아지는 황금보다도 찬란한 사람이라는 확신을.​


언니의 쇄골을 감싸고 있는 용 두 마리가 빨간색 브라끈 사이로 보이고 있습니다. 그녀의 오른팔을 둘러 내려오는 연꽃과 장미 넝쿨도요. 내가 어떤 사람도 이만큼 문신이 아름다울 수 없다고 생각한 그림들입니다.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언니의 손목 안쪽에 있을 모르포 나비 두 마리가 눈에 훤합니다. 언니가 생일 선물을 사갔을 때 아들이 해줬다는 말을 생각합니다.

"엄마는 하늘을 훨훨 나는 걸 좋아해서 손목에 나비가 있어."

이혼하고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을 여행하는 언니를 생각합니다. 지금 싱가포르에 있는 언니를 생각합니다. 언니의 손목에 있는 두 마리 나비를 생각합니다. 내가 그녀의 아들만큼 예쁜 표현으로 언니에게 사랑한다 말한 적이 있었는지도 생각합니다. 아직인 것 같습니다. 역시 언니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에요.





귀가하는 길 엘리베이터 없는 오 층을 올라오느라 심장이 콩콩 뛰었습니다. 언니의 사진을 보고 콧속이 느꼈던 두근거림과는 영 딴판인 펌프질입니다. 동생이 키우는 과체중 고양이는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다리 사이에 누워서 고간에 말랑한 앞발 하나를 올리고 자고 있습니다. 아직도 질 점막 안쪽이 얼얼합니다. 내가 삽입 자위를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도 언젠가는 꼭 써야겠어요.



최근에 브런치 구독자 중 한 분으로부터 장문의 메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마음이 참 감사해 답신을 어찌 보낼까 한 달을 넘게 고민하다가 결국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다시 저의 글을 읽게 될까요? 마구잡이로 쓴 글에 이리도 소중한 감상을 받을 줄 예상하지 못해서 놀라버리고 말았습니다. 누가 저의 글을 보겠어요. 멀리 보지 못하고 한 치 앞만 따라가는 부족한 사람의 단상일 뿐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데요. 고칠 생각도, 발전할 여지도 없이 나 혼자 보자고 써재낀 것들이라 나한테만 이쁜 거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이제야 조그맣게 말해봅니다. 저는 글을 잘 쓰고 싶고, 책도 내고 싶고,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에 과분한 감상을 남겨준 한 분의 구독자에게, 이런 난봉 같은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합니다. 평생 나 하나만 볼 거라면 애당초 글을 쓰지 않았겠죠. 어딘가에 올리지도 않았겠지요. 브런치를 만들지도 않았겠지요. 다 알고 있으면서도 퇴로가 필요해 이 핑계 저 핑계로 고집을 부렸습니다. 내 글은 나한테만 마음에 들면 된다는 고집, 책을 낼게 아니면 깊이 생각하지 않을 거라는 고집, 어차피 아무도 안 볼 테니 개의치 않을 거라는 고집. 사실 저는 누구보다 눈칫밥을 먹고사는 겁쟁이인데요. 써놓고 보니 언제나 그랬듯이 중구난방입니다. 이렇게 늘어놓았는데도 아직 다 못 쓴 것들이 줄줄이 줄을 서있어요. 마침 리베카 솔닛의 책을 읽는 중인데 공감 가는 문장이 있어 슬쩍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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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그처럼 빠르게 쓰일 때는 자기도 미처 알지 못한 머릿속 깊은 한구석에서 오래전부터 그것이 조직되고 있었던  분명하다. 글은 쓰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경주로에 나서고 싶어서 안달복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컴퓨터 앞에 앉자, 글은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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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순풍을 타는 날이라 정말 좋네요. 나사를 홀랑 풀고 나는 이런 글밖에 쓰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들키는 것도 좋고요. 밤마다 생각했던 이야기 중에 절반도 꺼내놓지 못했지만 속이 풀릴 만큼은 지껄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저의 글을 읽어주시겠어요? 다 까발리고 나니 자꾸만 욕심쟁이처럼 굴게 됩니다. 친구가 없는 사람이라 여기에서라도 많이 말해야겠어요.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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