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천사는 거짓말쟁이

나랑 지옥 한번 같이 가주지 그랬어요

by 해인
2021년 10월, 눈부셨던 천사와의 종로 데이트



"클로에는 올리비아를 좋아했다"... 펄쩍 뛰지 마세요. 얼굴 붉히지 마세요. 우리 사회 은밀한 것에선 가끔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걸 인정합시다. 때때로 여성은 여성을 좋아합니다.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중


*

벌써 2년 전 일이네.

싱가포르에 갔다 와서 한 달 반 정도 만났던 애인이 있었다. 그 애는 내가 무릎까지 오는 교복 치마를 입을 때 만났다. 아이돌 멤버처럼 생긴 얼굴에 조각 같은 몸을 한 그 애는 나를 좋아했다. 나는 그 애를 그렇게까지 좋아했던 것 같지는 않다. 좋아할 준비를 했을 뿐.


싱가포르에서 나는 도저히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고는 못 배길 경험을 했다.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많고, 지금까지는 성소수자가 아니었고(지금도 아닐지도 모른다), 나에게 키스를 하지만 남자 애인이 있다.

나는 내 주변의 모두에게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말하고 다녔다. 사랑은 나 혼자 품고 있기에는 너무 들뜨고 황홀한 것이라 참을 수 없었다. 언니는 아무에게도 내 얘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이에 샘을 내는 건 언니의 애인, 레오뿐이다. 그는 알고 있다. 왜냐하면 먼저 언니를 사랑한 건 나였으니까.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언니에게 다가가기가 힘들고 염려되고 걱정스러웠고 레오는 남자이기 때문에 성큼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할 수 있었겠지. 사실 이것도 그저 추측일 뿐이다. 레오도 언니를 만나는 데에 골치가 아팠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비겁한 질투가 든다.


내가 먼저 사랑했는데.


전 애인과 교제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말했다.


"싱가포르에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은 여자고, 나는 아직 언니를 많이 생각해."


그 애는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서로 연락은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지만, 일주일 만에 알아챘다. 언니에게 마음이 묶여버린 이상 나는 어떤 인연도 시작할 수 없을 거라고. 당연하지만, 언니에게 새벽에 사랑한다고 연락했다. 그녀는 늘 같은 답장을 한다.


나도.


나는 내가 사회의 시선에서 적당히 윤리적이고 타당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언니를 만나기 전까지만.

남자친구가 있는 여자와 키스를 한건 처음이다.(애인이 있는 누구와도 감정을 교류 한 적 없다)(심지어 키스를 한 번만 한 것도 아니었고, 술김에 한 것도, 후회한 것도 아니다) 교제를 시작한 사람에게 떳떳하지 않은 적도 처음이다.(나는 정말 언니와 연락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그럼 네가 언니보다 사랑스러워지던가) 언니를 사랑하는 게 나를 부도덕한 사람으로 만드는 걸까. 하지만 나는 언니를 포기할 수 없다.


시간 순서와 형식을 갖춰 제대로 쓰게 되면 언니와 내 사이가 지금보다 또렷해질까. 막상 머릿속에 있는 걸 꺼내놓으려고 앉아있으면 눈앞이 막막하고 까마득하다. 애인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그 외도를 사랑으로 합리화하는 것도 고난스럽다. 언니는 무슨 생각일까. 왜, 왜 나한테 키스했을까. 키스만 하지 않았어도 보석 같은 짝사랑으로 간직했을 텐데 왜 욕망하게 했을까. 왜 아직도 나에게 햇살 같고 바람 같을까. 언니가 나에게 느끼는 것은 호기심일까 귀여움일까 안쓰러움일까.

싱가폴에서 돌아오고 우리는 한국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고, 입을 벌리고, 키스를 했다. 아이돌을 닮은 남자애 같은 건 진즉 헤어진 지 오래다. 종로의 뒷골목에서 아이비 넝쿨 문신이 감긴 언니의 손을 잡고 물었다.


언니, 레오랑 결혼할 거예요?


언니는 넌더리를 치며 말한다. 으, 결혼은 안 해. 한 번이면 족해.


거짓말쟁이.

결혼은 다시 안 할 거라고 했으면서.

그녀는 올 가을 레오의 청혼을 승낙했다. 둘은 계속 행복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언니가 식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열심히 레오의 연적이 되어 보일 것이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녀의 웃음에 마음을 갖다 바칠 것이다. 그녀가 키스하면 눈을 감을 것이다. 언니의 입맞춤이 세상에서 제일 달다는 건 레오 네가 더 잘 아는 사실일 테지.


언젠가 언니가 나에게 했던 말이 잔잔하게 뇌 속에 고여 흐른다.


레오가 너를 많이 질투해.

아, 정말 지옥에 떨어질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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