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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머리털을 빡빡 밀었다

2025년 4월 15일, 이미 끝난 고공농성에 대한 시민 연대자의 기록

by 해인

2025.04.15


비가 온다.

김형수 지회장이 고공에 올라가고 난 이후로는 빗소리가 들릴 때마다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게 된다.

김형수 지회장이 있는 곳에는 천막도 지붕도 없고 방풍 비닐 보따리 하나만 덩그러니 있다. 지지대가 빈약한 30미터 고공, 바람이 너무 불어서 현수막이나 임시 구조물 설치도 위태로운 철탑 위. 그가 올라간 뒤에 비도 오고 눈도 오고 황사도 찾아왔다. 그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쩌다 이렇게 일기예보를 원망하는 사람이 되었나, 하고.

빡빡 밀어놓은 머리가 벌써 자랐다. 키위새 털처럼 부숭부숭하다. 머리를 잘라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 나는 김진숙 지도위원장의 <소금꽃나무>를 읽고 있었다. 챕터가 시작되는 페이지에 삭발한 머리에 단결투쟁 띠를 동여맨 여성노동자가 활짝 웃으며 동지와 포옹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광장에서도 퍽 많은 사람들이 삭발결의를 했다지. 나한테 삭발은 인생에 한 번쯤은 꼭 해보고 싶었던 이색머리스타일일 뿐이었는데 머리를 밀며 울었던 사람들은 나와는 얼마나 다른 각오를 가지고 있는 걸까. 나한테는 내버려두면 내버려두는 대로 길어지는, 때로는 성가시고 거슬리는 이 털이 누군가한테는 얼마나 소중한 걸까. 신체발모 수지부모라, 내 몸의 털 한 오라기도 꼭꼭 아끼는 그런 마음인가.

그전날 방문했던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농성천막에서는 멀리 앉아았던 동지가 후드를 벗으니 두피가 다 보이는 민머리를 하고 있었다. 자꾸만 머리 쪽으로 가는 시선을 억지로 다른 곳으로 돌리며 생각했다.

‘나도 저 머리 하고 싶었는데.’

미용실 선생님의 배려로 영화 <아저씨>의 원빈 흉내를 내며 신나게 머리를 밀었다. 고무줄로 모아 묶어서 다섯결이 나오는 숱 투성이 머리를 직접 가위로 잘라보았다. 서걱서걱 털뭉탱이가 잘리는 느낌이 선명하다. 이렇게 많은 것들이 내 몸에 치렁치렁 붙어있었다. 가위질 한 번도 오래 걸릴 만큼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군대 가는 총각들의 기장으로 막 깎은 머리는 만지는 느낌이 좋았다. 고개를 숙이면 긴 머리일 때 보이지 않았던 머리가마가 그대로 보였다. 가르마를 한쪽으로만 타면 탈모가 올 수 있으니 반대 방향으로 열심히 쓰다듬어주세요, 하고 선생님이 말했다. 문질문질. 머리를 밀고 나흘간은 틈 날 때마다 머리통을 문질렀다. 내 몸에 이렇게 손 맛 좋은 부분이 있다니. 좋은 느낌이다. 평생 삭발로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워시간이 말도 안 되게 줄어들었고, 쟁여두었던 트리트먼트도 쓸 일이 없어졌다. 드라이기도, 고데기도, 헤어오일도 집어넣었다. 대신 두피토닉을 샀다. 털 없는 머리는 쉽게 추워지고 쉽게 더워져서 밖에는 꼭 모자나 머리두건을 들고 다닌다. 긴 머리가 보온역할을 해줬던 건지, 머리를 자른 뒤로는 사시사철 뒷덜미가 시려 늘 손수건을 목에 두르게 되었다.

인생에 한 번은 해보고 싶던 머리였다. 만약 할 수 있다면 이 때여야만 했다. 동지가 고공에 올라간 지금, 내란범이 아직 탄핵이 되지 않은 지금. 결기도 아니고 심경의 변화도 아니다. 크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자르고 싶어서 잘랐다. 나는 털을 가지고 투쟁을 논할 만큼 거창한 사람이 아니다. 하고 싶은 걸 하는 걸로도 인생이 복잡스러운 평범한 시민이다. 일개 시민, 그냥 시민.

그러고 거통고 농성장에 갔다가 조합원 동지들이 더 눈망울을 그렁거려 혼쭐이 났다. 아무 일도 아니고, 지난 토요일에 바람이 너무 불어서 짜증스러워서 잘랐어요. 원래 자르고 싶었어요. 별생각 없었어요. 요즘 농성장 동지들 다 머리 자르잖아요. 저도 어린 친구들 스타일 좀 따라 해보고 싶었어요. 아, 아저씨들도 다 머리 자르면서 왜애.

진짜로 농성장에는 헤어스타일 바꾸는 게 유행이었다. 누구는 염색을 했고,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나타난 동지가 너덧명이 넘었다. 빨간 머리의 동지가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킥킥 웃었다.

“이제 내 주변에 삭발한 사람만 세명이야.”

그러니까, 유행이라니까요.

머리가 벌써 길었다. 감촉이 전만큼 좋지 않다. 이대로 기르면 어떤 꼴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다시 밀 생각은 없다. 머리를 기부한 기분이 꽤 좋았기 때문이다. 8년 정도 기르고 삭발을 하면 다시 소아암 환자 어린이들에게 털뭉치를 선물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에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고, 인생에 한번 해봤다. 거울 속의 나는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얼굴이고, 털 없는 머리통도 나쁘지 않은 두상이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고, 황사가 오면 모래를 뒤집어쓰고,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푹푹 끓거나 오들오들 떠는 머리를 해보고 싶었다. 자르기 전에는 몰랐다. 내 두피 위에도 늘 지붕이 있었다는 것을, 안전한 보호막이 있었다는 것을, 너무 쉽게 여성으로 특정되게 하고 위급할 때 쥐여 잡힐까 두려움을 주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 몸에 붙어있을 때는 오롯이 나를 위해 존재해 주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얼른 내려오자.

승리해서 땅을 밟자.

지금까지 있는 줄도 몰랐던 존재감을 잔뜩 부풀려 응원하고 지지하고 역성을 들고 편애할 수 있게, 얼른 같은 고도 같은 대지 같은 높이에서 보자. 장난치고 싶을 때 장난치고 화내야 할 때 화낼 수 있게, 안아주고 싶을 때 성큼성큼 가서 안아줄 수 있게 얼른 땅으로 내려오자. 하늘에 있는 감옥들도 모조리 문을 닫아버리자. 누구 하나라도 더 수감될 일 없게, 다시는 하늘에 사람이 열리지 않게.

김형수 동지, 보고 싶어요.




​(김형수 지회장은 2025년 6월 19일, 97일간의 고공 농성을 마치고 땅으로 내려왔다.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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