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하늘을 뒤바꾸어 주시오

그 일을 할 것은 당신뿐이 없소

by 해인


우리는 각자의 사정으로 참 절실했어요, 서울 중구 청계천로 86 한화빌딩 앞에서.




“미륵님이 오시면 세상은 곧 바뀐다 하였으니, 이 묵은 하늘을 벗겨주오.”


황석영, <장길산 9>



*

녹색병원에 입원 중인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김형수 지회장의 병문안을 다녀왔다. 김형수 지회장은 지난 6월 19일, 고공농성 97일 만에 사측과 극적으로 2024년 임단협을 타결하고 땅에 내려왔다. 지상에서 병원복 위에 금속노조 조끼를 입은 그를 다시 만났다. 말문이 콱 막힌다.


다시는 그렇게 올라가지 마세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무 일도 없는 양 광화문 잔디밭에서 청계천 8가를 부른 새벽에 혼자 한화빌딩 앞 30미터 CCTV 철탑에 올라가는 짓은, 절대로 두 번 다시 하지 말라고. 정말 못됐다고. 너무 속상했다고. 인생에 그런 경험은 다시 하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경북 구미의 불탄 공장 옥상에서 박정혜 동지가 오늘로 541일째. 명동 세종호텔 앞 철제 구조물 위에 있는 고진수 동지는 오늘로 139일째. 김형수가 말한다.


먼저 내려온 게 너무 미안해. 고개를 들 수가 없어.


노조탄압을 받는 노동자가 사는 세상은 나 하나가 싫다고 단식하지 않고 삼보일배하지 않고 고공농성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그나마 목을 매거나 분신하여 자살하는 것만큼은 못하게 하는 것이 한계다. 이렇게 동지를 지키려 갖은 애를 써도 열사들의 이름이 새 묘비에 새겨진다. 건설노동자들을 건폭으로 몰았던 윤석열 정부가 집권하던 2023년 5월 1일, 노동자들의 날인 노동절 아침에 양희동 지회장이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다. 올해로 2주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에게 고공에 올라가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아프게 하지 말라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김형수와 박정혜와 고진수가 사는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안전할 수 있도록 자본과 권력과 정치인의 꿈자리를 사납게 만들 방법, 그들을 미치도록 성가시게 만들 방법을.


형수 동지는 재미있는 장난을 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처럼 짓궂게 웃는다. 머리에 빨간 띠를 묶고 단상에 올라가면 얼마나 호랑이 같은 사람인지를 알아서 그렇게 웃고 있을 때마다 사진으로 찍어두고 싶다. 이만큼 예쁘게 웃는 사람을 본일이 없다. 우리 아빠 다음으로 예쁘다.


모가지를 팩 꺾어서 보아도 망원렌즈를 갖다 대지 않으면 볼 수 없었던 것들이 있다. 표정을 쓸 때마다 자르르 따라 움직이는 눈가의 깊은 주름. 수북한 머리숱에 듬성듬성 난 흰머리. 웃을 때 유독 한쪽만 올라가는 입꼬리. 재기 넘치는 눈동자 속에 반짝거림 같은 것.

이제 우리는 같은 고도에서 만나 카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지금 보면 다시 못 볼 것처럼 걸음을 뗄 때마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된다. 30미터 높이의 철탑에 걸린 게 파란 천막이 아니라 축 늘어진 누군가의 시체일까 봐 악몽을 꾸며 잠에서 깨지 않아도 된다. 고진수와 박정혜 동지도 지금의 거리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가득 품고 고공에 올라가 있겠지. 그 둘만 내려와도 케케묵은 하늘에 때가 좀 벗겨질 것 같다. 천지도 살짝은 개벽할 것 같다.


김형수가 내려왔다.

이제 남은 건 둘이다.


어서, 제발 저 묵은 하늘 좀 훌러덩 뒤집어 벗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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