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에 나랑 섹스할래?

하나같이 일진이 사나웠던 날

by 해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기와 결혼해 주겠다고 약속하면 지금 여자 친구와 헤어지겠다고 말하던 개자식에게서 연락이 왔다. 근무를 갓 시작한 때였다. 아침부터 장대비가 내리고 눅눅한 날씨에 이상하리 만치 기분이 좋지 않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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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 아르바이트하는 카페의 사장이었던 열세 살 많은 개새끼. 능청스럽게 잘 지내고 있냐고 묻는 것도 예전과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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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김호연 사장님? 저 사장님 싫으니까 연락하지 마세요. 제 연락처도 지우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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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다면 당신의 콧등도 물어뜯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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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미성년자를 좋아하는 이상성욕자다. 당신으로 인해 나는 그루밍 성희롱이 무언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 아이에게도 의사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아이는 어른의 말 한마디로 크게 흔들리고 제멋대로 안심하는 생물이다. 허락 한 번으로 세상 모든 것에 면죄부를 쥔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그런 관계. 적어도 고등학교 때의 나는 그랬다. 그렇게 아이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 앞에서 나는 그랬다. 내가 멍청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는 어렸고, 당신밖에 없었고, 그것이 그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것을 몰랐다. 애매하게 스스로가 다 컸다고 생각하는 나이. 보호자의 존재를 스스로 부정하는 나이, 열일곱 살. 그래서 당신은 개새끼다. 나는 나쁜 어른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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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내내 당신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십 년을 잊고 살다 불현듯 찾아오는 악몽은 방어조차 할 수 없게 머릿속을 좀먹는다. 당신이 죽었으면 했는데 아쉽게도 잘 살아있군. 나에게 연락할 철판과 배짱을 두둑이 깐 채로 노인이 되었군. 내가 스물여덟이니 당신은 이제 마흔 하나일 것이다. 잊고 있던 당신의 혐오스러운 행태가 고스란히 떠올라 가라앉지 않는다. 당신은 나쁜 어른이고 지금도 그렇게 좋은 인간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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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 하고 꾸역꾸역 근무를 하고 있는데 정신줄 나사가 여러 개 빠진 듯한 손님이 나에게 이번 주말에 자기와 섹스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뒤통수가 띵 해 진다. 개새끼 생각에 몰두하느라 내가 얼마나 이상한 곳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지 잊고 있었다. 나는 바텐더로 일하고 있지만 내가 일하는 곳은 '바'가 아니다. 여기는 그 무엇도 아닌 장소, 가게 안을 그럴듯하게 꾸며놓고 비싼 위스키가 팔리길 바라며 손님 옆에 여자를 앉혀주는 그런 곳이다. 한국에서는 들어보지도 못한 근무환경 안에서 나는 중년의 남자들 옆에 앉은 여자들을 망연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손님에게 이런 취급을 받는다. 바닥이 아래로 아래로 꺼져 내린다.

아침부터 비가 내려 우울하기 그지없는 날, 폭탄처럼 십 년 묵은 난봉꾼의 연락을 받았다가 또 손님에게서는 둘도 없는 개소리를 들었다. 정신이 혼미하고 명치가 답답해진다. 퇴근길에 트럭에 치여 객사라도 하게 되는 건 아닐까. 오늘이 무슨 날이라면 마가 잔뜩 낀 것이 틀림없다. 하루 종일 갈 곳 없는 불쾌감만 겹겹이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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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를 생각한다. 아이의 결정권을 운운하며 프랑스 식민지에서 미성년자 아동을 성 착취했던 백인 지식인 계층 남성 푸코와 성매매 여성이 놓인 환경에 대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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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텐더로 일하지만 바텐더이기 전에 머리털이 길고 체구가 작은 여성으로 보인다. 어깨를 드러낸 다른 접대여성과 다르게 셔츠를 목 끝까지 채우고 블레이저를 입고 있어도 그들에게 나는 자신의 옆이 앉아 있는 여성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상한 곳에서 일하고 있는 나는 바에 앉은 남성들에게 잠재적 섹스가 가능한 어떤 물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술에 대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바텐더가 아니라 웃음과 이야기를 살 수 있는 여성으로 보는 것. 그 시선을 모른척하기에는 너무나 자주 느껴지고, 형용할 수 없이 역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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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끼리 합의가 된 관계라는 전제가 성을 사는 남성과 성을 파는 여성에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회는 남성을 두둔하고 그들의 환락을 용인했으며 그에 따라 어떠한 선택으로 성을 파는 것까지 오는 여성이 생긴 것이다. 성매매는 존재 자체가 인권에 대한 모독이다. 거대한 인간 집단 내에서 남성 상위의 관계성이 가장 당연시되고 있는 사업인 것이다. 물물거래를 하듯이 본인이 가진 가치 있는 것을 내다 판다. 그것이 여성의 몸인 것이다. 바꿔 끼울 수도 없고, 다시 만들 수도 없는 살아 있는 인간 그 자체를 여성은 판매하고 남성은 구매한다. 그것이 어떻게 인간 대 인간으로서 동등할 수 있나. 그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은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이러한 상황을 덮어놓고 단순히 비즈니스로 생각할 수 있을까. 상품 그 자체가 인간이다. 태어나고 사고하고 통감이 있는 동족이다. 성노동자가 성을 팔게 된 경위를 과연 개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인격적 판단으로, 스스로의 의지로 외부의 압박은 전혀 없는 쾌적하고 행복한 상황에서 자신의 여성성을 판매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같은 바닥에 떨어져도, 남성과 여성이 마주칠 수 있는 상황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여성노동자의 비율이 월등히 높은 성매매 시장의 권력관계를 무시하고 사는 사람이나 파는 사람이나 같은 놈이라는 말을 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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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에게 이번 주말에 나랑 섹스나 할래?라고 물었던 사람과 그 질문을 들은 나는 분명히 다른 입장이다.​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을 데리고 졸업하면 결혼해줄 거냐는 억지를 부리며 옷을 입은 채 유사성행위를 했던 13살 연상의 카페 사장과 14살 어린 와이프와 애 셋을 낳고도 고등학교 3학년 학생에게 오피스 와이프라고 지껄였던 미술선생은 다 나를 인간이 아니라 잠재적 섹스가 가능한 생물로 보았을 것이다. 어리고 생식력이 좋은, 손아귀에 넣기 쉬운 계층의 피식자. 그 인간들은 한순간이라도 나를 인간으로 보기는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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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동안 바텐더를 해왔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적은 또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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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상한 곳에서 일하고 있다.​


하루빨리 이 거지 같은 곳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

쓰고 싶은 글들이 쌓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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