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히 제정신으로 돌아갈 테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템페스트> 중
세바스찬-하지만 양심은 어떻소?
안토니오-여보쇼, 그런 게 어디 있소? 발뒤꿈치에 종기 나면 슬리퍼를 신어야죠.
*
방황이 끝났다.
나는 이 이상한 곳에서 잘 버티다가 내년에 무사히 귀국할 것이다.
여기에 오지 않았으면 내 인생 언제 이렇게 저급한 인간 군상들을 목도할 수 있겠어.
한국에 있는 와이프 몰래 여자를 매일 바꿔 데려오는 인간,
집에 아내와 딸자식을 두고도 하룻밤 정사를 위해 여자에서 술을 푸지게 먹이는 중년,
제 옆에 여자가 없으면 직원을 불러 컴플레인을 하는 남성,
이번 주말에 자기와 섹스하지 않겠냐고 물어보는 추저분한 싱가폴리안까지
이런 곳이 아니면 언제 경험해 볼 수 있겠어. 입이 떡 벌어지는 추남들이 여기 다 모였다.
이 구정물 같은 곳에서 어떻게든 칵테일을 만들고 위스키 공부를 하다가 제정신으로 돌아가야지.
지금 와서 화내고 발을 굴러봤자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이런 가게에서 일하게 되었고, 사장 내외의 사업 수완은 쓰레기 같을지언정 뼛속까지 악인은 아니라는 것에 안도한다. 이미 싫은 티를 내도 너무 냈다. 어울리지 않는 곳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은 나면서 이 사람들에게 뿌리 박힌 사고방식을 탓했다. 그래, 이런 문화가 익숙하면 그럴 수 있지. 여자 있는 바만 가보았다면 본인들의 하는 짓이 유흥업소나 다름이 없다는 걸 모를 수 있지. 세상 모든 바가 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곳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살다 살다 이런 데에서 일하게 될 줄은 또 몰랐다. 눈 앞에서 내 또래의 여자가 띠동갑이 훌쩍 넘는 양반에게 술을 따라주는 것을 보았을 때는 피가 거꾸로 솟는줄 알았다. 그렇구나. 어딘가에 이런 음지가 있다는 것을 짐작만 하다가 내가 그 한가운데에 풍덩 빠지게 된 거구나. 이게 무슨 일이야. 이 무슨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야.
숨 한번 쉴 때마다 쌓여가던 스트레스도 정돈이 됐다.
휴일마다 싱가포르의 유명한 클래식 바를 돌아다니며 바 인더스트리를 관찰하고 재기 발랄한 바텐더들의 칵테일을 맛본다.
업장에서는 가지고 있는 재료들로 만들고 싶었던 것들을 죄다 만들고 레시피를 잡는다.
쉬는 날에는 위스키와 칵테일을 연도별로 주르륵 정리해볼 것이다. 손님과의 대화에서 흥미를 끌만한 야사들도 찾아보고, 양주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접근하기도 편하도록 스토리텔링도 만들어보고. 싱가포르에 있는 김에 한국어뿐 아니라 영어로 된 사이트도 손수 번역하며 들여다보아야겠다.
이 저질의 분위기와 장소에 매몰되기에 나는 너무 소중한 인간이다. 초반에는 이곳에서 보낼 나의 1년이 쓰레기통에 처박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서 좌절하고 분노하고 내가 아닌 타인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데에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뭐 답이 따로 있나. 다 내가 벌인 짓이지.
이 곳을 완전히 미워하기엔 처음 일했던 한 달이 나름 재미있었고, 찾아올 때마다 반가운 손님들도 생겨버렸다. 어디든 완벽하게 나쁜 쪽만 존재할 수는 없는 거니까. 그리고 사장 내외가 바텐딩을 하는 나를 접대 여성들과 무안할 정도로 분리하려는 노력이 보여 갸륵할 지경이다. 내가 일해왔던 곳이 본인들 가게와 같은 곳이 아닌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사장은 내가 화가 난 이유를 안다. 무의식 중에 내가 그들을 보는 눈빛에서 지금껏 일했던 바들과 비교하는 게 느껴지니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다. 그 꼴을 보면 또 마냥 화를 낼 수도 없다.
적절하지 못한 사람을 데려왔다는 것을, 적응할 수 없는 공간에 불려 왔다는 것을 쌍방이 느끼고 있다.
이렇게 되면 양 쪽 다 한 발짝 물러서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나는 남은 8개월동안 아니꼬운 거 다 봐주고 해야 할 일 맡은 업무는 문제없이 처리하며 손님들에게 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다가 남은 8개월 잘 있다가 나가야 한다. 재계약은 없다.
사장들은 물과 기름처럼 이 가게에서 동떨어진 나를 내버려 두어야 한다. 어차피 나는 이 가게에 녹아들 수 없을 테니까. 그럼 정말 혐오스러운 인간이 될 테니까. 이렇게 가게를 싫어하는 나를 남은 팔 개월 동안 월급 주면서 데리고 있어야 한다.
맑은 물에서 살다가 갑자기 하수구 물에 빠져도 죽으란 법은 없나 보다. 이 비린내 나고 역겨운 3 급수의 똥물에서 어떻게든 살아나갈 방법을 찾아 올해를 무사히 넘기고 여기를 탈출할 것이다. 남은 8개월은 스릴이 넘칠 거란 예감이 든다. 사장과 내가 서로 그어놓은 금을 어떻게든 밟지 않으려는 눈치 싸움. 누구 하나가 선을 넘기만 하면 당장 좋지 않은 얼굴로 인연을 마무리하게 될 거라는 예감. 그래도 가능하면 웃으면서 마무리하고 싶다는 바람.
나는 잘 지낸다. 싱가포르에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 어른이 된 기분이 들 정도로.
세상은 누군가의 잘못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모두 다른 사람이 부대끼느라 소음이 생기는 것 뿐이다. 나와는 다른 걸 보고 다르게 살아온 집단 속에서는 객식구가 된 기분으로 적당히 스스로를 맞춰야 한다. 발뒤꿈치에 종기가 나서 운동화를 벗고 슬리퍼를 신었다. 종기가 다 나으면 다시 운동화로 갈아 신는 것, 쉼 없이 새 신발을 꺼내 신는 것. 늘 내 발에 꼭 맞는 것도 아니고 내 발이 항상 건강하지만도 않은 것. 가끔은 습진에 무좀에 종기에 고생하기도 하는 그런 것이 인생인가 보다. 셰익스피어는 대체 몇 수 앞까지 내다본 건지. 양심이 어디 있어? 일하고 돈 받으면 그만이다. 이제는 원망스럽지도 짜증스럽지도 않다. 종기가 나서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그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