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그런 곳

바다를 그리워하는 일기

by 해인



한승태 <인간의 조건>

‘1.이틀발이 - 진도, 꽃게잡이’ 중


배 위에서는 고정된 바닥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정말 드물긴 하지만 바람도 불지 않고 파도도 치지 않아 배가 마치 거대한 젤리 위에 떠 있다는 느낌을 줄 때가 있었다. 작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환경이지만 내가 바다에 있던 동안 그런 순간은 모두 합쳐 20분도 채 되지 않았다. 바다가 언제나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 상태의 기이함을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에야 깨닫는다. 그토록 거대한 존재를 계속해서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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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읽고 있는 책인데 작가의 서술 방식과 표현이 몹시 흥미롭다. 작가가 직접 경험해온 노동과 직업을 주제로 한 책 <인간의 조건>. 첫 번째 순서부터 광활한 바다에 떨궈진 인간 군상들이 펼쳐진다. 작가가 말하는 바다의 묘사는 하나하나 모두 인상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붙잡고 싶은 문장이 있어 옮겨 적어본다. 언제나 움직이고 있는 다른 생물종들의 터전, 바다. 그리고 고여있는 거대한 물들을 언제나 출렁이게 하는 지구. 아름다운 표현이다.


땅끝에 간신히 붙은 도시국가라 싱가포르도 조금씩만 돌아다니면 바다가 보인다. 다이빙을 좋아해 은근슬쩍 수영복도 가져와봤지만 수소문을 해본 결과 싱가포르에선 마땅한 곳이 없을 거란 답변만 얻었다. 다들 넉살 좋은 미소로 말한다. 다이빙을 하려면 말레이시아를 가야 해. 비행기를 타고, 섬을 몇 개 건너서, 눈부신 바다가 있는 곳으로.

인류가 이모양으로 병이 걸리기 전에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육로로 넘나들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여권을 검문받아서 하루에도 숑숑 돌아다닐 수 있는 거리. 내심 한국으로 가기 전에 봉쇄가 풀리지 않을까 바라고 있는데 말레이시아의 상황도, 싱가포르의 상황도 영 좋지 않아 기약이 없다. 여기까지 왔는데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든다. 또 이렇게 욕심만 는다. 이런 시기에 여기까지 온 것만도 기적이면서도.


몇 주 전에 작은 나라가 들썩일 만큼 큰 사고가 있었다. 새벽 여섯 시, 스포츠카로 질주하던 5명의 청년들이 가로수를 들이받고 전원 사망한 일이다. 사고 직후에 일행을 구하러 차에 들어간 여성은 2차 폭발에 휘말려 전신 화상을 입었다. 바로 내가 일하는 지역, 내가 일하는 길목이었다. 먼 곳일 줄만 알았던 사고 장소가 가게 밖에 나와 고개를 쭈욱 빼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이었다니. 당일에 출근했던 매니저는 온 거리에 기름 냄새가 진동을 했다며 몸서리를 쳤다. 뉴스와 신문이 익숙한 지명들로 도배가 되었던 며칠. 손님에게 연락도 왔다. 한, 네가 일하는 곳 근처에서 큰 사고가 났대. 별일 없어? 다치진 않았지? 너희 가게는 아니지?

현재 싱가포르는 8인 이상 집합 금지, 밤 10시 30분 이후로 주류 판매 및 음주 금지다. 친분이 있는 손님들끼리는 알음알음 몇 잔 더 기울이곤 하던 것이 꿈도 꿀 수 없을 정도로 단속이 심해졌다. 직원 입장으로서야 퇴근이 훌쩍 빨라져 좋긴 하지만 단속반이 언제 문 밖을 지나갈까 조주 중에도 마스크를 신경쓰는 것이 여간 긴장되는 일이 아니다. 저 사고가 있은 이후로 한국인 23명이 강제 추방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들 쉬쉬하며 몸을 숙이고 있다. 하필 사망자에게 음주를 부추긴 일행 중 한국인이 끼어있던 터라 괜한 눈칫밥을 먹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아직도 요원하다. 2년은 두고 봐야 가닥이 보이려나.


몸에 바닷물을 묻히지 않은지 오래됐다.

횡격막에서 호흡을 끌어 올리는 느낌도, 수압에 고막이 팽팽해지는 느낌도. 까맣고 파란 바다에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느낌도.


작가의 이야기는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산에도 바다에도 어울리지 않는 몸뚱이라 말하면서 부단히 꽃게잡이 생활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작가가 단원의 마무리를 어떻게 낼 지 기대가 된다. 이런 때에 바다에 대한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상냥하고 투명한 영화 속 바다가 아니라 무겁고 자비 없는 무뚝뚝한 바다의 이야기라서 더욱더 좋다. 그래 내가 사랑했던 바다는, 이런 곳이었지.

끊임없이 흔들리고 한없이 많은 생명들을 내장처럼 흐르게 하는. 온도도 다르고 물밑의 결도 다른 그런 곳.



바다는

정말 그런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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