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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Jun 16. 2021

나의 빨간색 사치



장바구니 없이 집 밖에 나온 건 48일 만이었다. 거리 곳곳에는 보라색 하카란다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진한 꽃향기가 K94 마스크도 뚫고 들어왔다. 비말보다 강한 꽃향기라니. 지난 3월부터 시작된 스페인 전 국민 자가격리로 식료품을 사거나 약을 사러 가는 등, 몇 가지의 필수불가결한 상황을 제외하고선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던 날들을 보낸 후였다.     


그동안 햇볕을 쬐고 싶은 날이면 손에 장바구니를 들고서 집에서 3분 거리의 슈퍼마켓을 두고 일부터 15분 거리에 있는 비건 식품점에 가는 것으로 산책을 대신했다. 중간중간 하늘도 쳐다보고 팔도 크게 흔들며 천천히 걸었다. 가게에 도착하면 필수불가결하지 않은 인센스 스틱 같은 것들을 노트북 구입하는 정성으로 사곤 했다. 집에 돌아가 샌달우드, 플루메리아, 머스크 향을 돌아가면서 태우면, 몇 달째 나가지 못하고 있는 요가원의 냄새가 나는 듯했다.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다 시작한 격리가 끝나자 민소매를 입어야 하는 날씨가 되어 있었다. 집에 있는 동안 봄이 지나갔구나. 한 계절을 통으로 잃었네, 그건 좀 속상하다고 생각하며 오랜만에 시장으로 들어갔다. 시장에는 그동안 못 본 과일들이 나와 있었다. 납작 복숭아, 살구, 수박 사이에서 탑을 이루고 쌓여 있는 새빨간 체리를 보자마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체리가 나왔다!     


스페인에 오기 전, 사람들이 거기 가면 제일 먼저 뭐 하고 싶냐고 물을 때마다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체리 산처럼 쌓아놓고 마구마구 먹는 거요!”      



한국에서는 체리는 500g에 만 원이 훌쩍 넘는 몸값 비싼 과일인지라 지갑 사정 좋을 때만 먹을 수 있었다. 체리 시세를 꼼꼼하게 확인한 후 신중히 사서 한 알씩 아껴가며 먹었다. 체리를 마음속에 가득 품고 스페인에 도착한 9월은 이미 체리 철이 끝난 후였다. 체리가 나온다는 다음 해 5월 말이 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이런 2020년의 봄을 보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쎄레싸 운 낄로, 뽀르 파보르(체리 1kg 주세요).”     



고깔 모양 종이에 담긴 체리 1kg은 꼭 꽃다발 같았다. 꽃집에 들러 오렌지와 핑크색이 오묘하게 섞인 거베라 꽃도 한 단 샀다. 한 손에는 꽃다발을, 한 손에는 체리 다발을 들고 걸으니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부자 뭐 있나. 좋아하는 과일하고 꽃을 마음껏 살 수 있으면 그게 부자지. 이런 내 마음이 읽힌 듯 인스타그램에 올린 체리 사진 밑에 친구가 해시태그를 달아 주었다. #체리재벌      



체리 다발과 꽃다발을 번갈아 사다 보니 여름이 끝났다. 1년은 금방 지나 또다시 5월이 돌아왔다.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매일 체리를 사러 시장에 간다. 요즘 시장의 단골 과일가게 사장님은 나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쎄레싸 운 낄로?(체리 일 킬로그램 줄까?)”     



하고 물어보신다. 나는 대답 대신, 뭘 아시네 하는 마음을 담아 눈으로 힘껏 웃는다(코로나 시대에는 눈으로 잘 웃어야 한다). 체리 옆에 놓인 납작 복숭아와 수박도 1kg씩 샀다. 이렇게 샀는데도 6유로다. 과일의 색깔을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이미 일일 비타민 권장량이 채워진 기분이다.      


체리가 들어가면 여름이 끝날 것이고 나는 또 내년 5월을 기다릴 것이다. 그때는 “체리 1킬로 줄까?”라고 묻는 과일가게 사장님한테 눈웃음 대신, 잇몸을 활짝 드러내며 웃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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