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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Aug 03. 2021

어느날 우리 집 현관으로 고양이가 들어왔다



 문을 열자 하얀 비닐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렌즈를 안 껴 흐릿한 눈의 초점을 맞추니 비닐봉지가 점점 고양이 모양으로 변했다. 몸통이 하얀 얼룩 고양이었다. 비닐봉지가 고양이로 선명하게 바뀌는 순간 나도 모르게 “엄마야!” 소리가 튀어나왔다.


뭐지?  다른 집에서 키우는 애인가? 그러기에는 털 상태가 꼬질꼬질하고 발바닥이 새까맸다. 길고양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내 다리에 온몸을 비벼대고 배를 까며 드러눕는 게 사람 손 탄 애 같기도 했다. 얘는 어떻게 여기에 들어와서 우리 집 앞에 앉아 있는 걸까. 건물 현관문은 항상 닫혀 있고 열쇠로 문을 따야만 들어올 수 있는데. 다른 건물들과 거리가 있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도 불가능하고.


고양이가 깡말라 보여 뭐라도 먹을 걸 줘야할 것 같은데 집에 고양이사료는 커녕 빵 한조각 없다. 일단 급한 대로  접시에다 귀리유를 담아 주니 혀로 할짝거리며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급하게 나가던 참이라 엘리베이터로 가려는데 고양이가 길을 막으며 하악질을 하고 내 다리를 깨물었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건물을 나와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집주인이자 친구인 알레한드로에게 고양이 사진을 보내고 얘에 대해서 아는 게 있는지 물어보았다. 알레한드로는 그렇지 않아도 건물 이웃들 그룹 채팅방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계단에서 며칠째 지내고 있는데 어느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도 아니라는 내용을 봤다고 했다. 배에 털이 깎여 있는 게 중성화 수술을 한 것 같은데 그 자리에 털이 안 난 걸 보아서는 최근에 수술한 것 같다며 주변에 알리고 좀 더 알아보겠다고 했다. 


 고양이를 키우는 다른 친구들에게도 연락했다. 한 친구는 자기가 다니는 동물병원 수의사와 연락 후, 배의 수술 자국과 귀 끝이 살짝 잘린 거로 보아 시 보호소에서 중성화 수술을 시킨 후 풀어놓은 길고양이로 보인다고 했다. 개 두 마리와 고양이 한 마리의 집사이자 아파트 단지 길고양이들의 캣맘인 엄마한테도 물어보았다. 엄마도 같은 의견이라며 고양이가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일단 지켜보며 물과 사료를 잘 챙겨주라고 했다. 


 고양이 사료를 사 들고 돌아오니 고양이는 그 자리에 없었다. 혹시 몰라 위로 올라가 보았다. 고양이는 제일 위층 계단에 태평스럽게 앉아 있었고 나를 보더니 쪼르르 달려왔다. 내려놓은 물그릇에 머리를 박고 있는 고양이를 자세히 보니 상당히 미묘였다.



 “미묘야,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거야? 집고양이인데 사연이 있어 밖에서 떠돈 거니, 원래 길에서 사는데 어쩌다 여기 들어와 갇힌 거니?” 


괜히 한번 말을 걸어 보았지만 미묘는 사료만 아그작아그작 씹어 먹었다. 2021년에 범용화된 고양이 말 통역기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모르는 고양이가 집 현관문 앞으로 찾아오는 이 흔치 않은 일이 인생에서 두 번이나 생기다니. 코스타리카에 살 때도 도착한지 며칠이 안 됐을 때 문 밖에서 고양이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러시안 블루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그 아이는 미묘와 달리 털이 깨끗하게 잘 관리된 아이였고 발바닥의 핑크젤리도 선명했다. 그 아이는 서스럼없이 문 틈으로 들어와서 온 집을 자기집처럼 헤집고 다니다가 나갔더랬다. 그 후 며칠 내내 퇴근해 돌아오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앉아 있었다. 나중에 아랫집에서 키우는 외출냥인 게 밝혀졌지만, 





다음날에도 미묘는 우리 집 앞에 앉아 있었다. 전날 피가 날 정도로 세게 물려서 긴 레깅스에 발목까지 오는 양말을 신고 물과 사료를 챙겨 나갔다. 우리 층에 두면 혹시 옆집에서 뭐라고 할까 봐 미묘가 지내는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어제 내가 놓아둔 물과 사료 그릇 옆에 더 큰 물그릇과 생선 한 덩이가 담긴 접시가 놓여 있었다. 


오후에 나갔다가 돌아오니 웬일로 미묘가 2층에 있었다. 거기에도 고양이 물과 사료가 있었다. 이 건물 사람들이 고양이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건 확실했다. 지난 경험에 비춰봤을 때 한국이었으면 진작에 신고 들어오거나 누군가 작대기로 고양이를 쫓아버렸을 것이다. 




조심조심 아래로 내려가니 미묘가 현관문 앞까지 따라왔다. 갇혀 있는 건지 확인하려고 문을 열어 보았다. 그랬더니 한참 동안 멀뚱멀뚱 밖을 쳐다보다 위층으로 휙 올라가버렸다. 자기 의지로 이 건물 안에서 머물고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그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계속해서 이 안에서 살 수는 없었다. 한 층에 두 가구밖에 없는 좁은 건물에 공용 파티오도 없고, 창문이나 현관문으로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도 없었다. 똥오줌을 처리할 모래가 없어 이미 건물 복도 여기저기가 고양이 똥오줌이었다. 


오늘도 알레한드로에게 연락이 없으면 보호소에 직접 연락해 보려던 참에 메시지가 왔다. 고양이를 맡아줄 사람을 찾았다는 거다. 친구에 지인을 동원하고 여러 보호소를 통해 SNS로 미묘에 대한 글을 퍼뜨렸는데 누군가 그걸 보고 미묘를 보호하겠다고 했단다. 정말 다행이었다. 얼른 밖으로 나가 미묘를 찾았다. 미묘는 위층 계단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다가왔다. “미묘야, 너 보호해줄 사람 찾았대. 너무 잘 됐지?” 뭘 알아듣는 건지 갸르릉거렸다. 


보호해주실 분이 몇 시간 후에 온다고 했는데 영 신경이 쓰였다. 지금까지 문제없이 건물 안에 있기는 했지만 만에 하나 그사이 무슨 일이 생겨 누군가 밖으로 내보내면? 그렇다고 이 찜통더위에 고양이와 복도에 계속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좀 고민하다가 그분들이 올 때까지 미묘를 데리고 있기로 했다. 미묘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집 여기저기를 탐색했다. 오랫동안 밖에서 생활하면서 몸에 뭐를 묻히고 있을지 걱정이 안 된 건 아니지만 이참에 싹 다 대청소한다는 마음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미묘는 한 시간 정도 집안을 누비고 다니다가 제일 시원한 곳에 자리를 잡고 드러누웠다. 집 안에 나 말고 다른 생명체가 있는 풍경이 낯설었다. 






동물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한 번도 키우지 않았고 앞으로도 키울 생각이 없다. 부모님 댁 개들이 부모님이 집에 없는 동안 문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모습을 자주 보아왔다. 집을 자주 비우고 이동이 잦은 나는 반려동물을 키울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반려 식물을 많이 들였다. 


미묘가 편안히 잠이 들고 나도 마음 놓고 내 할 일을 하고 있을 때쯤 초인종이 울렸다. 인상 좋은 젊은 커플이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이동장을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미묘는 누운 채 그들을 멀뚱멀뚱 쳐다보더니 살금살금 다가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동장 안으로 쏙 들어갔다. 


어느 유튜버가 영하로 내려간 겨울 거리에 혼자 남겨진 새끼 고양이를 구조하려고 며칠 동안 시도했는데 성공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애기야, 살려면 가자.’라고 말하자 숨어 있던 고양이가 튀어나와 이동장으로 들어가던 영상이 떠올랐다. 


 미묘가 떠난 자리에는 털만 잔뜩 남았다. 단 두 시간뿐이었는데 이상하게 허전했다. 미묘가 올라간 소파의 커버와 쿠션을 걷어내 탈탈 털어내고 세탁기를 돌렸다. 바닥도 쓸고 락스를 뿌려 깨끗하게 대걸레로 닦았다. 몇 시간 뒤 알레한드로가 비디오를 하나 보내왔다. 그 영상에서 미묘는 바닥에 앉은 새 집사의 다리에 머리를 얹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그르렁거리고 있었다. 미묘의 새로운 이름은 린다라고 했다. 린다는 스페인어로 귀엽다, 예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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