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하든 글로 돈을 버는 사람이 되겠다며 국어국문과에 입학했다. 국문학 수업과 창작이 별 상관이 없다는 건 입학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깨달았다. 3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창작 수업을 들었다. 형이상학적 시를 쓰는 것으로 유명한 시인의 현대시창작 수업이었다. 작고 깡마른 체구에 반무테 안경을 낀 시인은 초여름에도 목에 머플러를 단단히 두르고 다니셨다.
수업에서는 한 학기 동안 총 여섯 편의 시를 써내야 했다. 과제 때문이 아니고서 일부러 시를 찾아 읽지 않고 쓴 적도 없는 날들 속에서 여섯 편의 시를 완성하는 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시상을 찾아다니던 일상은 꽤 시적이기도 했다.
이게 과연 시가 될까 의문을 가지고 제출한 시 중 한 편은 교수님의 혹평을 받고, 한 편은 극찬을 받았다. 나머지는 기억도 없다. 학기 마지막 날 교수님은 나를 포함한 몇몇 학생들을 연구실로 부르셨다. 교수님은 천천히 일어나 창문 쪽을 한번 보더니 몸을 돌리며 말씀하셨다.
“자네들은 계속해서 시를 써.”
영문을 모른 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같은 자리에 있던 다섯 명 중 두 명은 몇 년 후 등단 시인이 되었고 나는 그날 이후 단 한 편의 시도 쓰지 않은 채 대학을 졸업했다.
3년 전 시인의 부고를 들었다. 암 투병을 하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문득 그때 쓴 시가 읽고 싶어져 대학 때 과제 폴더를 열어 보았다. 노트북을 몇 번 바꾸며 파일이 날아간 건지 한 편의 시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용을 생각해내 보려 해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수업 중 학생들의 시가 쓰인 종이를 꽉 쥐고 흔들던 그의 마른 손과 최승자 시인의 시 <담배 한 대 피우며> 뿐이었다.
담배 한 대를 피우며
한 십 년이 흘렀다.
그동안 흐른 것은
대서양도 아니고
태평양도 아니었다
다만 십 년이라는 시간 속을
담배 한 대 길이의 시간 속을
새 한 마리가 폴짝 건너뛰었을 뿐이다.
나의 십 년은 담배 한 대 피우지 않고, 시 한 편 쓰지 않은 채 흘렀다. 작가님 소리를 들으며 살고 싶었는데 10년째 선생님 소리를 들으며 살고 있다. 제때 꺼내지 못한 단어들이 명치에 걸려서 자주 체했다. 어떻게든 얘네들을 꺼내 써야 안 아프고 살 것 같았다.
명치에 걸려 있는 말이 수만개도 넘는데 그중 문장으로 완성되어 나오는 건 수십개도 채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렇게 힘들게 뚫고 나온 단어가 몇 안 되는 사람에게 도달하고, 그 몇 안 되는 사람들중 몇 명의 마음에 겨우 가서 닿을 거라 생각하면 글 쓰는 게 너무 외로워진다. 괜않아. 단 한 명한테라도 울림을 주면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정말로 한 명한테만 닿으면 어쩌나 덜컥 겁이 난다.
그럴 때면 시인의 말이 귓가에 웅웅거린다. ‘자네들은 시를 써. 시를 써, 써.........’
10년은 대서양도 태평양도 될 수 없는 시간이지만 새 한마리가 폴짝 건너 뛸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기도 하다. 은유 작가는 글이 언제 느는 걸 느끼기 시작했냐는 질문에 10년쯤 됐을 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최승자 시인의 <담배 한 대 피우며> 시는 이렇게 끝난다.
(그래도 시간들은
은가루처럼 쏟아져 내린다)
은가루처럼 쏟아내린 10년의 시간 뒤에 나의 글은 조금 더 나아져,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 닿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