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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Jul 14. 2021

나의 프랑스 언니



여기에서 사귄 친구 한 명을 소개해 주고 싶어.



이름은 안느, 프랑스 사람이고 스위스에서 25년을 살았어. 제네바에 있는 국제기구에서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번역가로 20년을 일하고 조기 은퇴 후 햇빛과 저렴한 물가를 찾아서 남부 스페인까지 온 거야. 나이는 안 물어봐서 몰라. 가족은 러시안블루 고양이 두 마리가 있고. 한 마리 이름은 ‘마차’, 다른 한 마리는 ‘센차’. 응, 마차라떼 할 때 그 마차 맞아. 이 친구가 차를 엄청 좋아하거든.



10년 전에는 방콕 지부에 발령이 나서 거기서 4년을 살았대. 그래서인지 아시아 정세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처음 만났을 때도 지긋지긋한 북한 드립을 안 치더라. 처음 같이 한국 식당에 간 날은 뭘 추천해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이미 메뉴판에 있는 웬만한 메인 음식들은 다 먹어 봤더라고. 만두를 서양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 ‘교자’라고 하지 않고 정확하게 ‘만두’라고 말하는 걸 보고 조금 놀랐어. 그렇지. 교자는 교자고 만두는 만두잖아?



어느 날은 같이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비건 망고 아이스크림을 주문해서 먹고 있는데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엄밀히 말하자면 이걸 비건 아이스크림이라고 할 수는 없어.”

“왜? 우유 아니고 물 베이스라고 했는데?

”그런 식으로 만드는 건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셔벗이니까.“



이 이야기를 프랑스에 사는 친구한테 하니까 음식에 대해서 엄격한 게 너무 프랑스인답다는 거야. 그러니까 안느한테는 아이스크림과 셔벗은 엄연히 다른 음식인 거지. 교자는 교자고 만두는 만두인 것처럼.



이런 음식에 대한 엄격함은 말에도 드러나. 식당에 가면 와인 테스팅세 번은 기본으로 해. 마음에 안 들면 대놓고 얼굴을 찌푸려. 그때마다 뻣속 깊이 유교 DNA를 장착한 나는 이래도 되나 싶어서 조마조마해. 종업원들이 돌아다니면서 맛 괜찮냐고 물어보면 나는 감정 없이 ‘맛있어요.’ 하고 마는데 안느는 소스가 짜다, 국물이 싱겁다, 음식이 너무 식었다... 콕 집어서 구체적으로 말하더라고.



심지어는 내가 해 준 잡채를 먹고도 좀 짜다고 하는 거 있지? 아니, 대접한 요리인데 그냥 예의상으로도 맛있다고 하고 말 수 있잖아? 그런데 그런 생각보다는 아, 조금 짜기만 해서 다행이다 싶었어. 못 먹을 정도였다면 이 친구는 분명 젓가락을 내려놓았을 테니까.



한번은 같이 중국집에 간 적이 있어. 고기랑 해산물을 안 먹는 나는 두부와 미역이 들어가는 수프를 주문했는데 나온 음식에 다진 고기가 둥둥 떠 있는 거야. 아차 싶었지. 한국에서 야채 김밥에 야채만 있는 게 아니고 고기가 디폴트로 들어가듯 중국 요리도 고기 베이스가 많은데... 주문 전 다시 한번 확인 안 한 자기를 탓하며 고기를 걷어내고 있는 나를 조용히 바라보더니 안느는 곧바로 종업원을 불렀어.



메뉴 설명에 안 쓰여 있는데 어떻게 고기가 같이 나올 수 있냐며 당장 바꿔 달라고 하더라. 종업원은 미안하다고 하면서 바로 고기 없는 새로운 수프를 내어 왔어. 이런 안느의 단호함을 볼 때면 어떤 상황에서든 내 과실부터 먼저 찾고는 했던 내 안에서 작은 물결이 일었어. 이 까탈스럽고 예민하고 다정한 친구가 점점 좋아지기 시작한 거야.



아, 나 방학했다고 이야기했던가? 대면수업과 온라인을 동시에 하는 반대면 수업으로 시작해서 다시 온라인으로 바뀌었다가 결국 반대면으로 끝난 요상한 학기였지. 쉽지 않았어. 쉬고도 싶었지만, 방학 동안 생활 리듬이 무너지지 않게 루틴을 좀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안느한테 어떤 루틴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봤어. 번역도 엉덩이로 하는 일이니까 이 친구는 제대로 된 루틴이 있을 것 같았거든. 그랬더니 이런 대답을 하더라고.




“내 인생에서 한 번도 그런 거 만들어 본 적 없어.”



역시나 단호한 대답에 웃음이 나려는데 안느는 이렇게 덧붙였어.



매일 일어나면 오늘은 뭘 해 볼까? 그날 기분이 내게 말해주는 걸 잘 듣고 그걸 해. 그렇게 매일 새로운 걸 하며 사는 거야. 매일 똑같은 걸 하는 생활을 일부러 만들다니, 생각만 해도 지루해”



한동안 미라클 모닝이니 루틴의 중요성이니 이런 말들이 여기저기에서 들릴 때면 뭘 그리 자꾸 부지런해지라고 하나 싶어 못마땅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 못마땅함은 나는 잘 해내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서 오는 거기도 했어. 루틴이 일상을 단단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에는 어떤 의심도 없었지.



사전에서 ’루틴‘의 정확한 뜻을 찾아봤어. 국어사전에서 ‘루틴’을 검색하면 ’운동선수들이 최고의 운동 수행 능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습관적으로 하는 동작이나 절차‘라고 나와. 영어사전에서 ‘routine’을 찾으면 첫 번째 뜻은 ‘구체적으로 하는 일의 통상적인 순서와 방법. 두 번째는 ‘지루한 일상의 틀, 판에 박힌 일상’이더라.



루틴이 일상을 견고하게 만들어줄 ‘틀’이 되어줄 수는 있겠지만, 그 틀 안을 다채롭게 채워가는 내용도 중요할 텐데, 왜 그동안 ‘틀’에만 그렇게 집착한 걸까?



오늘은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일어났어. 그리고 침대에 앉아서 나한테 ‘오늘은 뭐가 하고 싶니?’, ‘뭐를 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 하고 물어봤어. 오늘은 38도까지 올라간대. 한국처럼 어딜 들어가도 에어컨이 빵빵 나와서 일순간 열기를 식힐 수 있는 그런 곳은 물속밖에 없으니까 일주일째 못 끝내고 있는 책을 들고 바다에 갈래. 내일은 글쎄, 내일의 내가 하고 싶어하는 걸 하려고.



그런데, 우리 8월에 한국에서 만나면 뭐 하지? 일기장 한 면 가득 위시리스트를 빼곡하게 채워놓았는데, 그건 그냥 잊어버릴래. 오늘의 우리는 모르는 그 날의 우리가 하고 싶어지는 것들을 하자. 아, 그래도 콩국수는 꼭 먹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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