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대초록 Oct 06. 2021

더이상 도미토리룸에서 묵지 않는 이유


 

호스텔의 도미토리룸을 좋아했다. 혼성 도미토리도 딱히 개의치 않았다. 주로 혼자 여행하다 보니 정보 얻기도 일행 만들기도 쉽고, 잘 때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묘하게 마음이 놓였다.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혼자 자는 걸 무서워하던 시절이었다. 30대에 들어서며 함께 도미토리에서 자던 친구들이 다양한 이유로 다인실에서 개인실, 호스텔에서 호텔로 숙소를 이동할 때도 나는 별 불편함 없이 계속 도미토리룸을 이용했다. 대신, 숙박비를 아낀 돈으로 먹는 음식의 수준을 높여 갔다.


  몇 년 전 페루에서 하룻밤에 7,000원 하는 여행자 숙소에서 묵을 때였다. 사막 투어 후 땀과 모래로 범벅이 된 몸을 이끌고 공용 샤워실에 들어갔다. 온수가 잘 나오지 않아 물을 빼고 있는데 물이 그대로 발목까지 차올랐고, 샤워부스 옆의 변기에서는 지린내가 올라왔다. 물에 잠긴 발목 옆으로 둥둥 떠다니는 머리카락 뭉치를 보며 현타가 왔다.


 ‘이 돈 아껴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다음날 바로 짐을 싸서 호텔로 옮겼다. 물이 잘 빠지는 욕조 안에서 따뜻한 물에 샤워한 후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켜며 퀸사이즈 침대에서 뒹굴거리니 그제야 평정심이 찾아왔다. 호텔 하루 숙박비는 27,000원이었다. 이 가격에 쾌적한 곳을 혼자 독차지할 수 있다는 유혹은 달콤했다. 그리고 이듬해 더는 도미토리룸에서 묵지 못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 사건은 코스타리카에서 일할 때 서핑을 배우러 간 해변 마을에서 일어났다. 그 마을은 파도가 좋아서 서핑 트립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혈기 왕성한 서퍼들은 해가 떠 있을 때는 바다에서 서핑을 즐기고 해가 지면 클럽에서 밤새도록 파티를 했다. 낮 동안 파도에 온몸을 두들겨 맞고 숙소에 돌아오면 같은 도미토리의 파티 피플들이 모두 클럽에 가 있어 일인실처럼 쓸 수 있었다.


  하루는 숙소에 돌아오니 평소와 달리 미국 남자 한 명이 자고 있었다. 그날도 파도에 맞은 온몸이 아파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는데 이상한 기척에 잠이 깼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전히 다른 침대는 다 비어 있고 자고 있던 남자가 이층 침대 사이를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는 곧 문 앞에 있는 내 침대 근처까지 왔다. 잠이 싹 달아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내 침대 앞에 몇 초간 서 있더니 갑자기 바지 앞섬을 풀어헤쳤다. 너무 놀라 숨이 멎고 귓구멍에 있는 솜털까지 쭈뼛 섰다.


그리고 남자는 갑자기 문을 밀쳐 열고는 그 자리에서 오줌을 싸기 시작했다! 쏴 하는 소리가 그치자 그는 다시 비틀대며 침대 사이를 헤매더니 내 바로 옆, 비어 있는 다른 여자애의 침대에 철퍼덕하고 엎어졌다. 그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리셉션으로 뛰어가 소리쳤다.  

     

“방에서 웬 미친놈이 문 앞에 오줌싸고 남의 침대에서 누워 자고 있어요!!!”      


  스태프는 나와 함께 방으로 가 남자를 흔들어 깨우며 당장 샤워하고 네 침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말했다. 술에 떡이 된 그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샤워실로 들어갔고 스태프는 청소도구를 가져와 바닥을 닦아내고 내 방을 바꿔 주었다.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벌렁거리는 심장이 가라앉지 않았다. 남자가 바지를 내리는 순간 밀려왔던 엄청난 공포감이 가시지 않아 쉬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날 이후 다시는 도미토리룸에서 자지 못했다.


  영화 <여교사>의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과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에서 게임 참가자들의 숙소 안에서 일어난 번외 게임을 보며 다른 사람과 한 공간에서 잠을 자는 그 흔한 일이, 내가 자는 동안 상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점에서 사실은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서 잘 수 있다는 건 상대가 잠든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완전히 신뢰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도.


  이제는 여행 가면 호스텔 도미토리 대신 에어비앤비의 개인실에서 지낸다. 혼자 자는  무서울 때는 한참 지났다. 사람 무서운 줄도 안다.  밖에서는 호스트나 다른 게스트들과 교류하고  안에 들어오면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마음 편히 잔다. 도미토리룸이 편하던 시절, 누군가  근처에서 자고 있을  마음이 안정된 것처럼,  너머에 누군가 자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나쁜 마음을 먹으면 문을 잠갔다고  못하겠냐만, 벽을 두고  공간에 있는 우리가 서로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다. 상대방도 그렇게 믿고  잠들  있기를 바라며.



매거진의 이전글 코로나 시대의 한국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