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텔의 도미토리룸을 좋아했다. 혼성 도미토리도 딱히 개의치 않았다. 주로 혼자 여행하다 보니 정보 얻기도 일행 만들기도 쉽고, 잘 때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묘하게 마음이 놓였다.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혼자 자는 걸 무서워하던 시절이었다. 30대에 들어서며 함께 도미토리에서 자던 친구들이 다양한 이유로 다인실에서 개인실, 호스텔에서 호텔로 숙소를 이동할 때도 나는 별 불편함 없이 계속 도미토리룸을 이용했다. 대신, 숙박비를 아낀 돈으로 먹는 음식의 수준을 높여 갔다.
몇 년 전 페루에서 하룻밤에 7,000원 하는 여행자 숙소에서 묵을 때였다. 사막 투어 후 땀과 모래로 범벅이 된 몸을 이끌고 공용 샤워실에 들어갔다. 온수가 잘 나오지 않아 물을 빼고 있는데 물이 그대로 발목까지 차올랐고, 샤워부스 옆의 변기에서는 지린내가 올라왔다. 물에 잠긴 발목 옆으로 둥둥 떠다니는 머리카락 뭉치를 보며 현타가 왔다.
‘이 돈 아껴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다음날 바로 짐을 싸서 호텔로 옮겼다. 물이 잘 빠지는 욕조 안에서 따뜻한 물에 샤워한 후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켜며 퀸사이즈 침대에서 뒹굴거리니 그제야 평정심이 찾아왔다. 호텔 하루 숙박비는 27,000원이었다. 이 가격에 쾌적한 곳을 혼자 독차지할 수 있다는 유혹은 달콤했다. 그리고 이듬해 더는 도미토리룸에서 묵지 못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 사건은 코스타리카에서 일할 때 서핑을 배우러 간 해변 마을에서 일어났다. 그 마을은 파도가 좋아서 서핑 트립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혈기 왕성한 서퍼들은 해가 떠 있을 때는 바다에서 서핑을 즐기고 해가 지면 클럽에서 밤새도록 파티를 했다. 낮 동안 파도에 온몸을 두들겨 맞고 숙소에 돌아오면 같은 도미토리의 파티 피플들이 모두 클럽에 가 있어 일인실처럼 쓸 수 있었다.
하루는 숙소에 돌아오니 평소와 달리 미국 남자 한 명이 자고 있었다. 그날도 파도에 맞은 온몸이 아파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는데 이상한 기척에 잠이 깼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전히 다른 침대는 다 비어 있고 자고 있던 남자가 이층 침대 사이를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는 곧 문 앞에 있는 내 침대 근처까지 왔다. 잠이 싹 달아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내 침대 앞에 몇 초간 서 있더니 갑자기 바지 앞섬을 풀어헤쳤다. 너무 놀라 숨이 멎고 귓구멍에 있는 솜털까지 쭈뼛 섰다.
그리고 남자는 갑자기 문을 밀쳐 열고는 그 자리에서 오줌을 싸기 시작했다! 쏴 하는 소리가 그치자 그는 다시 비틀대며 침대 사이를 헤매더니 내 바로 옆, 비어 있는 다른 여자애의 침대에 철퍼덕하고 엎어졌다. 그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리셉션으로 뛰어가 소리쳤다.
“방에서 웬 미친놈이 문 앞에 오줌싸고 남의 침대에서 누워 자고 있어요!!!”
스태프는 나와 함께 방으로 가 남자를 흔들어 깨우며 당장 샤워하고 네 침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말했다. 술에 떡이 된 그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샤워실로 들어갔고 스태프는 청소도구를 가져와 바닥을 닦아내고 내 방을 바꿔 주었다.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벌렁거리는 심장이 가라앉지 않았다. 남자가 바지를 내리는 순간 밀려왔던 엄청난 공포감이 가시지 않아 쉬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날 이후 다시는 도미토리룸에서 자지 못했다.
영화 <여교사>의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과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에서 게임 참가자들의 숙소 안에서 일어난 번외 게임을 보며 다른 사람과 한 공간에서 잠을 자는 그 흔한 일이, 내가 자는 동안 상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점에서 사실은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서 잘 수 있다는 건 상대가 잠든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완전히 신뢰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도.
이제는 여행 가면 호스텔 도미토리 대신 에어비앤비의 개인실에서 지낸다. 혼자 자는 게 무서울 때는 한참 지났다. 사람 무서운 줄도 안다. 방 밖에서는 호스트나 다른 게스트들과 교류하고 방 안에 들어오면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마음 편히 잔다. 도미토리룸이 편하던 시절, 누군가 내 근처에서 자고 있을 때 마음이 안정된 것처럼, 벽 너머에 누군가 자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나쁜 마음을 먹으면 문을 잠갔다고 뭘 못하겠냐만, 벽을 두고 한 공간에 있는 우리가 서로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다. 상대방도 그렇게 믿고 푹 잠들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