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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Oct 12. 2021

그럴만한 번아웃은 없다

해외에 사는 게 뭐 쉬운 줄 아나요

  



  처음 맞은 남부 스페인의 겨울은 생각보다 추웠다. 한국과 비교하면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갈 때 정도의 기온이지만, 춥다고 하기도, 안 춥다고 하기도 애매한 이상한 추위가 있었다. 햇볕은 쨍한데 공기는 축축하고, 실내는 난방을 잘 안 해서 으슬으슬했다. 수영하다 물에서 막 나왔을 때의 한기가 종일 유지된달까. 한국 겨울은 정신이 얼얼할 정도로 추워도 실내만 들어가면 순식간에 따뜻해지는데 여기는 강도 약의 추위를 종일 끌고 가는 기분이라 체감 기온도 낮고 겨울도 더 길게 느껴졌다.


  날이 추우니 배터리 성능 68%인 아이폰7의 배터리 닳는 속도도 더욱 빨라졌다. 방전이 빨리 되는 건 휴대폰뿐만이 아니었다. 삼십몇 년째 쓰고 있는 내 몸도 평소보다 급격히 방전되고 충전도 느렸다. 해외에 살면 가만히 숨만 쉬어도 모국에 살 때보다 에너지 소모가 크다만, 정착 단계의 긴장기는 지났고 이제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충전이 느린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때 우연히 팟캐스트 ‘듣똑라’의 한 에피소드에서 정신건강의학 전문의 안주연 님이 번아웃 증후군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거기에서 설명하는 증상과 내 상태가 완전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증상은 업무 효율성 저하, 두 번째는 일에 대한 환멸감, 세 번째가 무기력감. 집중력이 떨어져 평소면 한 시간이면 끝낼 수업 준비에 세 시간이 넘게 걸려 고생 중이었고, 주변에서 알아주는 열정맨이었는데 모든 게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스페인까지 와서 모든 게 밋밋하고 재미없었다. 7년에서 9년 차 직장인한테서 가장 많이 나타난다는데 당시 일 시작한 지 딱 9년 차. 전조는 그 전해부터 있었다. 그간 정신없이 산다고 내 상태를 제대로 보지 못하다가 어느 정도 상황이 안정되며 잔뜩 긴장하고 사느라 뭉치고 경직된 마음의 근육통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팟캐스트를 들으며 백 퍼센트 공감했던 내용은, 다른 사람들에게 열정 넘치는 사람으로 보이는 동기 부여인들은 열정 있는 상태를 인생의 기본값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상태, 즉 뭔가 '생산'하지 않는 시간을 무기력하다고 생각해 좀처럼 견디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초반의 열정이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줄어드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그 공백을 못 견디고 불나방처럼 새로운 자극을 찾아다니며 두뇌를 괴롭힌다고.


  몸이 피로를 느끼고 짜증하고 우울할 때는 몸이 주는 쉬라는 신호이니 가능하면 생산성 강박에서 벗어나 두뇌를 괴롭히지 말고 쉬어 줘야 한단다. 자꾸 동기 부여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자기 주도성도 좀 줄이고, 일할 때도 새로운 걸 개발하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하는 걸 그냥 따라가기도 하는 게 좋다고.


  ‘내가 번아웃이라니, 대체 뭘 했다고?’라는 의문을 가지기 무섭게 마음에서 억울함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야, 너 2년에 한 번씩 나라를 옮겨 다녔어. 네가 빨리 새 환경에 적응하고 크게 안 아프게 하려고 우리가 얼마나 용쓴 줄 알아? 그리고 너, 한국에서 일 몇 개 했어? 제대로 쉰 적은 있고? 맨날 불안하다고 온갖 일 벌이고 다니는 거 수습은 누가 했어? 스페인 생활이 안정됐다고? 갑자기 인터넷이 안 되거나 은행 계좌에 문제가 생겨도 그거 하나 해결하는데 한국에서보다 시간과 에너지가 배로 드는데, 우리가 뭘 했다고라니, 너무한 거 아니야?’     


  억울함의 말이 맞았다. 그동안 나는 나를 너무 하대했다. 이 정도는 해야 열심히 사는 거라고 기준치를 정해두고, 그걸 조금만 만족하지 못해도 게으르다고, 나태하다고 타박했다.


  나에게 숨 쉴 구멍을 좀 주어야 했다. 자꾸 새로운 것들을 하려고 하지 말고, 지금 하는 일을 잘 수행해 내는 거로도 대견하다고 해 주고, 종종 소파에 누워서 유튜브 채널 보며 낄낄거리고, 세상 쓸데없는 것들을 검색해도 괜찮다고 해 주고. 친구를 당장 사귀지 않아도 된다고, 사람을 만나기 싫으면 무리하지 말라고, 다 때가 되면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하며 저전력 모드로 지냈다.


  그렇게 지나간 첫 학기의 마지막 주, 한 학기 동안 다른 나라에 와서 살고 일하느라 수고한 나에게 선물을 해 주기로 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45분 걸리는데 지하철역까지 20분 거리를 걸어 다녔다. 노트북에 교재, 수업 자료, 도시락까지 한 짐 지고 다닌 것도 피로에 한몫했을 것이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택시로 15분 거리, 택시비는 10유로. 느긋하게 아침 먹고 커피까지 한 잔 내려 마셨는데도 평소보다 더 일찍 도착하니 삶의 질이 급격하게 향상된 것 같았다. 10유로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렇게 4일을 연달아 택시를 타고 출근했다. 그 가벼운 출근길이 얼마나 좋던지, 차가 사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현실은 운전면허도 없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신세를 지면 어떻게든 갚으려고 하면서 왜 나의 수고는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았을까. 나를 좀 풀어놓고 대접해주다 보니 어느덧 공기에 찬 기운이 빠졌다. 뼛속까지 시리던 추위가 조금씩 사라지고 살살 에너지가 돌기 시작했다. 겨울이 지나가고 스페인에서 맞는 첫 번째 봄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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