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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Oct 26. 2021

스페인의 빨래 널기, 방심하면 안 됩니다



집안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더러운 건 싫으니까 조금만 더 가면 더러워지겠다 싶을 때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숙제하는 심정으로 집안일을 해치운다. 언뜻 보면 깔끔한데 줌렌즈로 당겨보면 섬세함이 떨어지는, 그러니까 한 80점대 수준의 청결도를 유지하며 산다. 1인 가구는 다들 이렇게 사는 줄 알았는데 언젠가 지인이 청소가 취미라고 말하는 걸 듣고 꽤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난다. 세상에, 집안일이 즐길 수 있는 거였다니. 꼭 해야 하는 일을 좋아하기까지 한다면 이건 뭐 가산점을 갖고 태어난 거 아닌가 싶어 부러웠다.      


 집안일 중에서 제일 싫은 건 걸레질, 설거지, 비질(지금 집에는 청소기가 없다), 다들 더러운 것을 정화해야 하는 작업들이다. 그나마 덜 싫은 건 빨래와 관련된 것들. 빨래도 정화 작업인 건 마찬가지지만 세탁기가 대신해주고, 널거나 갤 때는 이미 깨끗해진 상태니까.


집안일 중에서 제일 집중해서 하는 것은 빨래 널기이다. 남부 스페인의 대부분의 가정집에는 집밖에 빨랫줄이 달려 있다. 실내에 빨래 건조대를 펴고 빨래를 너는 데 익숙한 한국인에게 빨랫줄과 빨래집게의 존재란 낯설었다. 생각 없이 집게질을 했다가는 옷이 그대로 떨어지거나 마른 옷에 집게 자국이 남기 일쑤였다.


  무거운 후드티도 떨어뜨리지 않고 자국이 남지 않게 잘 고정할 수 있게 된 건, 수건 두 장, 속옷 한 장, 티셔츠 한 장, 양말 두 켤레를 떨어뜨리고 난 후다. 가끔 우리 집 빨랫줄에서도 윗집 빨래집게나 옷 등이 발견되는 걸 보면 이곳 사람들한테도 빨래 널기는 쉽게 방심하면 안 되는 일인 듯하다.


  조금만 집중력을 잃어도 아랫집에 가서 옷을 주워 달라고 해야 하는 귀찮은 일이 생기고, 자칫 바람에 날려가기라도 하면 찾을 수도 없다. 그러니 온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집게 다리 사이의 동그란 홈에 빨랫줄을 통과시키고 두 다리가 헛돌지 않게 집게 다리로 빨랫감을 단단히 집어야 한다. 내 앞에 있는 것에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 빨래하며 마음챙김 명상까지 챙길 수 있지요.


이렇게 널어놓은 빨래는 뜨거운 남부 태양 아래서 두세 시간 만에 바싹 마른다. 잘 마른 빨래에서는 햇볕과 바람을 섞어 놓은 냄새가 난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2년 동안 빨랫줄 생활을 하다 보니 이제 미숙하게 옷을 떨어뜨리는 일 따위는 없다고 자만하던 어느 날, 빨래를 널다 아끼는 무인양품 잠옷 바지를 떨어뜨려 버렸다. 다행히 잠옷은 아랫집 빨랫줄 위로 안전히 착륙했다. 순간 이걸 그냥 둬야 하나 찾으러 가야 하나 마음의 갈등이 시작됐다. 평소였다면 아끼는 것이니 찾으러 가는 게 당연하겠지만 몇 주 전 아랫집과 좀 껄끄러운 일이 있어 쉽게 찾으러 갈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는 밤 10시에 누가 문을 두드려 나가 보니 아랫집 어른들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 아침 7시면 샤워하는 소리와 발소리가 나서 시끄럽다는 것이다. 8시 반에 초중고등학교가 첫 수업을 시작하고 직장인 출근 시간이 9시인 스페인에서 7시는 일어나 등교나 출근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지 꼭두새벽이 아닌데. 게다가 그 시간에 세탁기를 돌린 것도 아니고, 음악을 크게 틀어 놓은 것도 망치질을 한 것도 아닌데 이게 밤 10시에 찾아와 할 소리인가 싶어서 당황스러웠다. 혹시 스페인에서 아침 7시에 샤워를 하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룰이라도 있나 해서 친구에게 물어보니 그런 게 어디 있냐며, 샤워는 내가 원하는 시간에 언제든지 해도 된다고 하더라.


  오래된 건물에서 위층 화장실 물소리나 발소리가 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시끄럽다고 하니까, 혼자 사는데도 마치 보이지 않는 룸메이트 신경 쓰듯 조심조심하며 살았다. 이랬는데도 마주쳤을 때 또 한 소리 한다면 기분이 상할 것 같아 가능하면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으면 했는데, 일부러 찾아가 뭔가를 부탁하는 일이 생기다니.      


  수건이나 양말이었다면 버리는 셈 치고 깨끗하게 포기했을 텐데 왜 하필 요즘 날씨에 잘 입고 있는 잠옷이야.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래도 내 수면의 질을 책임져주는 부드럽고 보송보송한 잠옷의 촉감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무인양품이 없으니 똑같은 것도 비슷한 것도 살 수 없다고. 결국 용기를 충전해서 찾으러 가기로 했다. 자기 옷도 아닌데 축축한 상태로 잡아야 하면 싫어할 것 같아서 일부러 두 시간쯤 지나 빨래가 어느 정도 마른 뒤에 아래로 내려갔다.


최대한 공손하게, ‘저, 귀찮게 해서 죄송하지만 제 빨래가 떨어져서 왔는데 좀 주워 주실 수 있을까요?’라는 말이 유창하게 나오게 몇 번씩 연습한 다음에 아래로 내려가 벨을 눌렀다. 다행히 지난번에 올라온 어른들은 없고 그 집 딸이 있어서 흔쾌히 잠옷 바지를 가져다주었다. 그 사이 잠옷 바지는 바싹 말라 있었다. 현관문을 조심조심 닫고 집으로 들어가 다시는 아랫집으로 옷을 찾으러 가는 일이 없도록 겸손하고 신중하게 나머지 빨래를 걷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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