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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Nov 14. 2021

내 가방을 열던 소매치기와
눈이 마주쳤다



 오후 세 시쯤,  점심 식사 후 나른해져 커피를 한잔하려고 백팩에 노트북과 책을 챙겨 넣고  카페로 향했다.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뒤에서 뭔가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뭐지 하고 뒤를 돌아본 순간  내 뒤에 딱 붙은 채로 가방을 열고 있던 웬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악 소리와 함께 무슨 짓이냐고  소리를 빽 지르며 가방을 껴안으니, 남자는 자기도 놀랐는지 으쓱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말을 내뱉고 나자 이 사람이 흉기라도 있으면 어쩌지 싶어 갑자기 겁이 났다. 다행히 큰길이라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얼른 가방을 낚아채고 보니  앞주머니가 열려 있었다. 보통 거기에 귀중품은 넣어두지 않아 가방 깊숙한 곳을 살피니 지갑이며 휴대폰은 그대로 들어 있었다. 내가 물건을 챙기는 동안 그는 뭔 일 있었냐는 듯 큰길로 유유히 사라졌다. 해가 중천에 뜬  벌건 대낮에 대로변에서 일어난 일이다.


다행히 잃은 물건은 없지만  그동안 소매치기는커녕 이런 비슷한 일 한 번 당한 적이 없었기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어디서부터 따라온 거지? 내가 집에서 나오는 것부터 본 걸까? 대낮이었고 큰길이었기에 망정이지 행여나 밤에 사람 없는 후미진한 골목이었다면? 아직까지도 그 남자와 눈을 마주쳤을 때의  잔상이 선명하게 남아 소름이 끼쳤다. 괜히 백팩을 한쪽 어깨에 메고 손으로 감싸 안은 채 뒤에 누가 있나 싶어 계속 살피면서 걸었다. 갑자기 이 도시의 풍경이 달라 보였다. 그와 비슷한 체격에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한 남자들을 보면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말라가가 스페인에서는 비교적 안전한 곳이라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준으로 안전함을 생각하면 큰일 난다. 카페나 식당에서 테이블 위에 휴대폰이나 노트북 같은 소지품을 올려놓은 채 주문을 하러 가는 건 내 물건 가져가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고,  의자에  가방을 걸어 놓는 것도 (특히 테라스에서) 안 하는 게 좋다.


예전에 여행 전  버스터미널 앞의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하고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려는데 어차피 잠겨 있기도 하고 귀중품은 없으니까 캐리어는 괜찮겠지 하고 자리에 두고 다녀오니 카페 종업원분이 내 캐리어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서 계셨다. 그는 나를 보더니 걱정스러운 말투로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고 가볍게  타박했더랬다.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백팩도 에코백도  메고 다니지 않았다. 지퍼에 똑딱이까지 있는 가방을 앞으로 메고 손으로 감싼 채 걸어 다니다가 슬슬 도시가 익숙해지고 치안이며 분위기가 감이 오자, 백팩도 에코백도 메고 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바르셀로나 같은 소매치기로 악명 높은 도시를 여행할 때는 아예 코트 안에 가방을 넣고 다니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녔다. 조심성이 습관이 되긴 했지만 아무래도 스페인에 살고 있다 보니 다른 도시를 여행할 때면 조금 편하게 다녔던 것도 사실이다.


스페인 생활 2년 2개월, 많은 것들에 익숙해지고 일상도 스무스하게 굴러가는 시점에서,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일어난 일인 것 같다.  이곳에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건,  얼마나 적응했건, 나는 여전히 외국인이고 쉽게 눈에 띌 수 있는 사람이는 걸, 잊을만하면 또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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