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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Oct 27. 2019

안달루시아의 쏘울, 플라멩코

말라가에서 플라멩코를 보다


지금까지는 늘 해결해야 하는 숙제들이 있었던 상황이라 아주 마음 편히 말라가를 누비고 다니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제 가장 중요한 숙제였던 집 문제가 해결됐고 개강도 해 첫 수업 스타트를 끊었으니 숙제 없는 금요일을 한번 맘껏 즐겨 보기로 했다.


이번 주말 동안 나의 미션은 미술관 하나 가기, 공연 하나 보기.


여행 가면 크고 유명한 미술관이 아니라도 그 지역의 미술관은 꼭 들르곤 한다. 미술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미술 작품 보는 걸 좋아한다. 좋아해서 알게 되는 거지 알아야 좋아할 수 있는 건 아니니!

여러 미술관 중 단 한 곳만 갈 수 있는 시간이 허락한다면 무조건 선택하는 곳은 현대 미술관. 마침 지난 숙소 근처에 말라가 현대 미술관이 있었고 첫 주말 바로 향했으나 한동안 문 안 연단다.


말라가에는 미술관과 박물관이 꽤 많고 대부분이 일요일 다섯 시 이후부터 폐관 시간까지 무료 관람이 가능하다. 하지만 엄청난 인파 틈에 끼여 봐야 한다기에 그냥 돈 내고 널찍하고 편안히 보기로 했다. 좋아서 또 가고 싶다면 그때 무료 관람 시간을 이용하면 되니까.


말라가에서 방문한 첫 번째 방문한 미술관은 카르멘 티센 박물관(Museo Carmen Tyssen). 입장료 10유로 딱 준비해서 내밀었는데


"오늘 전시 무료야."

"응? 오늘 금요일인데?"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특별 무료 개방이라고! 꺄올 아무튼 횡재!                


카르멘 티센 박물관 입구

       

박물관 내부 모습

        


                             

론리플래닛의 설명에 의하면 카르멘 티센 박물관(Museo Carmen Tyssen)은 2011년에 개관한 최신 박물관으로 말라가의 역사적 중심인 옛 무어인 지구에 위치한 16세기 궁전을 감각적으로 개조했으며. 광범위한 소장품 중에서도 19세기 스페인, 안달루시아 미술에 집중되어 있으며, 호아킨 소로야 이 바스티다, 이냐시오 술로아가,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등의 회화 작품도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기획 전시관도 역시 19세기 작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19세기 말라가를 비롯한 안달루시아 지방의 생활상이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대부분의 그림에 플라멩코를 추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게 인상적이었는데 사실 스페인에 오기 전까지 플라멩코 하면 머리에 꽃 달고 커다란 주름 잡힌 치마 들고 춤추는 이미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 정도로 그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다. 그래서인지 플라멩코는 현존하는 전통이 아니라 민속촌 같은 곳에서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보여주기식 전통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얼마 전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플라멩코 라디오 채널이 잡혔는데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추임새가 꼭 판소리 같기도 하고 자꾸 듣다 보니 매력 있어 며칠 동안 계속 틀어놓고 있었다. 음악을 듣다 보니 대체 플라멩코가 정확하게 뭔지 궁금해졌다.


플라멩코는 18세기 후반 19세기 초 안달루시아 서부 과달키비르 계곡 하류에 살던 집시들에 의해 처음 발생했으며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의 고뇌를 표현한 음악이라 한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처럼 춤뿐만이 아니라 노래와 춤, 기타 반주 그리고 하레오라고 하는 흥을 돋우는 소리로 구성되는데 이 네 가지가 각자 독립된 예능이며 서로 합이 잘 맞아떨어져서 플라멩코의 맛이 산다 한다. 그리고 안달루시아 지역이 기원이라 말라가에서도 수준 높은 플라멩코 공연을 볼 수 있단다.


그렇다면 당장 보러 가야지!


정통 플라멩코 공연을 볼 수 있고 플라멩코 강좌도 열린다는 켈리페에 공연 예약을 하고 박물관으로 오는 길이라 그림 곳곳에서 보이는 플라멩코에 정말로 저 시대 안달루시아 사람들의 삶 속에 플라멩코가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반가웠다.


시장, 광장, 페리아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항상 플라멩코가 있었다. 그림에서 댄서들은 긴 치마에 커다란 숄을 걸치고 손이나 머리에 꽃을 달고 있었는데 전통 플라멩코 의상이 19세기 안달루시아 의복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여성은 숄과 긴 주름 장식이 달린 치마를 입고 부채를 들고 남자들은 납작한 코르도바식 모자와 몸에 달라붙는 검정 바지를 입는다고.


플라멩코 의상 판매하던 가게


                                  

플라멩코가 꽃 피던 시절의 모습을 그림으로 먼저 접하고 9시 공연장으로 향했다. 의자 네 개가 놓인 작은 무대와 테이블과 의자 몇 개가 다인 단출한 소규모 공연장이었다. 금요일이라서 예약이 많아 30분이나 지체된 후 드디어 무대 위로 아티스트들이 올라갔는데


낮에 예약받던 분은 기타리스트, 리셉션에 있던 분은 댄서, 자리 안내해주던 분은 가수. 엄청 가족적이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었고 기타리스트의 연주로 시작해서 남자 가수분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를 부르는 내내 다른 아티스트 분들은 발을 부르고 손뼉을 치고 추임새를 넣으면서 박자를 맞추었다. 그렇게 한참을 노래가 이어지다 여자 가수분이 흥을 주체를 못 하겠는 듯 앉은 채로 손사위를 하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현란한 손사위와 스텝, 우아한 어깨 놀림, 무엇보다 표정! 표정 연기가 압권이었다. 인생의 희로애락이 한 얼굴에서 드러나다니, 슬펐다가 고통스러웠다가 환희에 찼다가 절망스러운 그 표정의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숨을 못 쉴 지경이었다. 꼭 신내림 받는 무당 표정 같기도 했다.


그 표정에 따라 나도 같이 먹먹해졌다가 기뻤다가 호흡이 가빠지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다가 했다. 완전히 감정을 통제당한 기분.



     

그렇게 한 시간 반이 휙 지나갔고 마지막에는 남자 연주자와 가수분들이 일어나서 노래 부르며 우스꽝스럽게 춤을 추셔서 마무리까지 흥겨웠다. 그분들의 땀방울까지 보일 정도로 작은 공간에서 느껴지는 그 에너지에 고무되어 집에 돌아와서도 흥분이 가라앉지가 않았다.



그들이 노래하는 가사를 모두 이해할 수 없어도 그 표정과 선율과 박자와 리듬은 만국 공통의 것이라 머리를 거치지 않고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예술에는 언어가 필요 없으니까. 언어는 서로 다른 문화 사이에서 소통할 수 있게 하는 다리를 놓아주지만 예술은 그 단계를 휙 뛰어넘어버리니까. 언어를 가르치는 나는 소통에 언어가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가끔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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