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달루시아의 가을 것들
기온이 뚝 떨어졌다.
시월 초까지만 해도 낮에는 민소매를 입어도 될 만큼 햇빛이 뜨거웠다. 한국에서 사계절 옷 다 챙겨 오기는 했지만 과연 이걸 다 입게 될까 의구심이 드는 스페인 남부 지방의 가을이었다.
2주 전 마드리드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기온이 떨어지더니 지난주에 긴 바지, 긴소매 옷을 꺼냈다.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어 처음으로 쌀쌀하다 느껴질 정도였다. 통이 넓은 청바지에 줄무늬 긴팔 티셔츠, 빨간 카디건, 제일 좋아하는 조합으로 옷을 꺼내 입으니 진짜 가을이 된 것 같아 살짝 들떴다.
얼마 전 길에서 웬 연기와 함께 풍겨오는 익숙한 냄새에 두리번거리다 세상에, 군밤장수를 마주쳤다. 코스타리카에 있을 때 제일 그리웠던 게 밤이었다. 냄비째 밤을 삶아 놓고 이로 반 똑 쪼개서 슥슥 파먹으면 얼마나 맛있는데! 그 밤을 여기에서 먹을 수 있다니. 그것도 군밤을.
수업이 없는 날, 오전 요가 수업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군밤 장수가 눈에 띄었다. 오늘은 저걸 사 먹어야겠다 다짐하고 발걸음을 급히 옮겼다. 잠깐, 그런데 어떤 식으로 파냐고 스페인어로 뭐라고 하더라? 멈춰 서서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중 한 스페인 가족이 군밤 장수에게 다가간다. 얼른 뒤쫓아 갔다. 저 가족이 사는 거 보고 따라 해야지.
뭐 질문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군밤 장수가 먼저 종이를 돌돌 말아서
"큰 걸로 드릴까요, 작은 걸로 드릴까요?
하고 물었고, 아주머니께서 작은 건 얼마고 큰 건 얼마냐 물으셔서 다 해결됐다.
3유로에 작은 봉지 하나를 샀다. 한 손으로 까 입에 톡 던져 넣으며 말라가 중앙 시장인 Atarazana 시장으로 향했다. 필요한 채소 좀 사고 나오는 길 홍시하고 비슷하게 생긴 과일이 있어 다가갔다. 아니 이건 홍시다. 감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스페인에서 홍시를 먹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심지어 6개에 1.25유로밖에 안 한다. 안 살 수가 있나.
집으로 돌아와 홍시 껍질을 벗겨내 한 입 베어 무니 한국에서 먹던 그 맛 그대로다. 앉은자리에서 세 개를 해치웠다. 가만, 홍시가 있다면 곶감도 있을 지도...? 찾아봐야지.
요즘 말라가엔 단풍과 낙엽 대신 빨간색, 핑크색, 보라색 등 색색의 꽃이 한창이다. 한국의 가을이면 열에 아홉은 입고 다니는 트렌치코트나 재킷을 입은 사람도 없어 날씨만 선선해졌다는 거 말고는 딱히 계절감이 느껴지지 않던 날들이었다.
오늘 군밤에다 홍시 먹으니 이제야 가을 기분이 난다. 한국의 가을과 결은 다르지만 분명 가을이다. 이렇게 안달루시아의 가을의 한가운데를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