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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Oct 31. 2019

아무리 스페인이지만 이건 적응 못 해

달을 보고 걷느냐 해를 보고 걷느냐

코스타리카에서 보낸 시간과 비교해 스페인에서는 딱히 적응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적응 안 되는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일출 시간. 도착한 9월 초에는 여덟 시에 뜨더니 이제는 여덟 시 반에 해가 나온다. 아홉 시 수업이라 일곱 시 반에 집에서 나서면 깜깜한 중천에 달만 환하게 떠 있다. 요즘 한국 일출 시간이 여섯 시 반이니 네 시에 일어나서 다섯 시 반에 나가는 것과 같은 꼴이다. 이러다가 12월 되면 아홉 시에 해 뜨는 거 아님?



한국에서도 이렇게 깜깜할 때 출근해 본 적 없어 처음 며칠은 길 나서는 것도 무서웠다. 하지만 사람들은 책가방 메고 이어폰 꽂고 휴대폰 쳐다보며 어둠을 헤쳐 꿋꿋이 자기 길 가더라. 새벽 아닌 시간 어둠 속 출근길 풍경의 부조화스러움이 익숙해질 때쯤이면 슬그머니 어둠이 가신다.  

 

학교에 도착하면 이렇게 해가 나온다.


한국에서부터 아침잠이 많은 편이었다. 알람 열 개는 기본으로 맞춰놓고, 늘 단번에 일어나지 못하고 순차적으로 알람을 꺼가며 꾸역꾸역 일어나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그랬던 내가, 코스타리카에 있는 2년 동안 단 한 번의 괴로움 없이 여섯 시면 눈을 번쩍 뜨는 상쾌한 생활을 하고서는 깨달았다.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었던 이유가 나의 의지박약만은 아니었다는 걸!


해가 다섯 시 반에 뜨니까 여섯 시면 햇빛 알람에 자연스럽게 깼던 거였다. 그런데 여기는 한국이랑 출근 시간은 같은데 해는 두 시간 늦게 뜨니.... 이건 심히 괴롭다. 아니, 그럼 출퇴근 시간도 한두 시간 늦어져야 되는 거 아닌가? 식사 시간은 해시계를 따르면서 출근 시간은 왜 국제 시간에 따르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학생들도 해 뜬 지 삼십 분 후에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려면 얼마나 힘들겠나. 그 생각하니 안 조는 것만 해도 감사하다. 물론 해도 늦게 지니까 활동 시간이 길어진다는 장점이 있지만, 밤늦게 밖에 돌아다니는 편 아니라 나한테는 크게 의미 없다. 이게 과연 적응이 될까 싶었다. 아니 끝까지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던 일요일, 알람을 맞추지 않은 아침, 햇빛 알람에 눈을 뜨고는 아홉 시 넘었나 하고 시계를 봤더니 아직 일곱 시 반이다. 이렇게 밝은데 아직 일곱 시도 안 됐다니. 이럴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 시계가 고장 났나 생각하다 아, 오늘부터 서머타임이 해제된다고 들은 게 떠올랐다.


유럽에서는 3월 마지막 주 일요일부터 10월 마지막 주 일요일까지 서머타임이 적용되어 한 시간씩 빨라지는데 10월 마지막 일요일인 오늘부로 서머타임이 해제되어 다시 한 시간이 늦춰진 것이다. 어휴 다행이다. 이제 일곱 시 반에 해가 뜨게 되었으니 달 보며 출근할 일은 없겠다.


다음날, 같은 시간에 집 밖을 나왔는데 사방이 환하다. 좌표처럼 하늘에 콕 박혀 있던 달도 사라졌다. 출근길 달 대신 해가 보이는 거 하나로 삶의 질이 열 단계는 상승한 기분이다. 영영 적응 못할 것 같았는데 서머타임, 네가 날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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