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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Nov 03. 2019

마드리드, 이런 숙소는 처음이라

마드리드에도 이런 집이


스페인에 온 지 한 달 된 기념으로 마드리드에 다녀왔다. 처음 말라가 밖으로 나가는 여행이었다. 비행기가 좀 더 쌌지만 시간대가 한정적이기도 하고 이왕이면 휙 날아가기보다는 스페인 땅을 꼼꼼하게 딛고 지나가고 싶어 고속 철도를 탔다. 한국인들에게 마드리드는 바르셀로나만큼 인기 있는 도시는 아니지만 스페인의 수도이고 유럽의 삼 대 미술관 중 하나가 있으며, 코스타리카에서 만난 친구가 살고 있기에 안 갈 이유가 없었다.


이런 숙소는 처음이라


혼자 여행 가면 보통 호스텔의 도미토리에서 묵는다. 혼자 자는 게 무섭던 이십 대 초반에는 방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게 묘한 안심이 되었고(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동행 구하기도, 정보 얻기도 쉬워서 도미토리가 불편하다는 생각은 딱히 해 본 적 없었다.


그런데 3년 전부터 도미토리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페루 쿠스코에서 하루에 7,000원 하는 여행자 숙소에 묵을 때였다. 고단한 몸을 끌고 샤워실에 들어갔는데 배수구의 물이 잘 빠지지 않아 발목까지 물이 차올랐고 샤워 부스 바로 옆의 변기에서는 지린내가 올라왔다. 잠긴 발 옆으로 둥둥 떠다니는 머리카락 뭉치를 보며 현타가 왔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꼴 보면서 여행하고 있는 거지?



다음날 바로 짐을 싸서 하룻밤 27,000원인 호텔로 옮겼다. 물 잘 빠지는 욕조에서 샤워 후 시원한 맥주 한 병 들이키며 퀸 사이즈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니 평정심이 돌아왔다. 그 후에 한동안 도미토리에 묵을 수 없었던 결정적인 한 방이 있었지만 그건 다음에.


도미토리가 힘들 때 이용하는 여행자 숙소는 에어비앤비이다. 남는 방 한 칸을 내어 주는 공유 숙소의 본질에 맞게 운영되는 에어비앤비는 관광지보다는 주거지역에 있는 경우가 많아 현지인들의 삶을 면밀히 볼 수 있고, 그들의 집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요즘 일반 여행자 숙소도 많이 올라오는 건 안타깝다)


처음으로 에어비앤비 숙소에 묵은 건 마이애미를 여행할 때였다. 환경 운동가와 건축가인 부부가 개 두 마리, 고양이 네 마리와 함께 사는 집이었다. 값비싼 물건 하나 없이 책과 레코드판, 식물만으로 취향을 오롯이 드러낸 인테리어 센스에 감탄하며 나도 언젠가는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타이베이에서 묵은 액세서리 디자이너의 공방,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발코니가 있던 우아한 집, 서울에서 집 구하기 전까지 들어가 있던 한국인 프랑스인 부부의 연남동 집 등 지금까지 묵은 열 곳이 넘는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다른 이의 공간을 경험했다.



이번 마드리드 여행에서도 에어비앤비의 본래 목적에 충실한 현지인의 집에서 묵고 싶어 가격과 위치가 적당한 슈퍼 호스트의 방 한 칸을 예약했다. 말라가와는 또 다른 느낌인 차분하고 고즈넉한 마드리드의 주택가를 신기해하며 숙소 건물 앞에 도착했다. 외관 깔끔하고 내부에 경비도 있는 큰 건물이었다. 맞이하러 나온 호스트 뒤를 따라가는데 문을 하나 열더니 아래로 내려간다. 순간 흠칫했다.


지하.... 였어?


계단을 두 바퀴 내려간 그곳은 반지하도 아닌 완전한 지하였고, 건물 가운데가 ㅁ자로 뻥 뚫려 있어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이 약간 보였다. 그 ㅁ자 사이로 빨랫줄이 거미줄처럼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다.


올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경쟁 후보작으로 오른 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페인 앤 글로리>에서 주인공이 어린 시절 지하 동굴 집으로 이사 가는 장면이 나온다. 대낮에도 깜깜한 동굴집 천장에는 철창살이 있는 작은 구멍이 하나 있는데 어린 주인공은 그 아래서 하늘이 보인다며 좋아했다. 지금 딱 그 장면 속으로 들어간 것 같다. 어라, 하늘이 보이네.

            

페인 앤 글로리(Pain and Glory)의 한 장면. 한국에선 개봉 전

                              

외관과 내부의 이 믿기 힘든 간극에 호스트 앞에서 표정 관리가 안 될 뻔했다. 매우 아담한 집 안에는 방이 두 개 나란히 붙어 있는데 하나는 남자인 호스트의 방이고 다른 방이 내가 묵게 될 방이란다. 방에는 장금 장치도 없다. 후기도 좋고 에어비앤비에서 인증받은 슈퍼 호스트의 집이니 뭐 별일이야 있겠냐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삼 일 내내 잠을 설쳤다.


지금까지 겪어본 호스트들은 게스트가 있는 시간에 공용 공간에 잘 나와 있지 않았는데 이 호스트는 숙소에서 돌아오면 현관문 바로 앞의 소파에 매우 편한 자세로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고, 내가 샤워한다고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해도 자기 방으로 안 들어가고 거실에 머물러 있었다. 자정이 넘어도 TV를 보며 우적우적 뭔가를 씹는 소리를 내고 크게 웃었고 (방문 바로 앞이 소파라 방음이라고는 1도 없다) 새벽 두 시까지 밖에서 부스럭거려서 잘 수가 없었다. 아침 아홉 시가 넘어도 햇빛 한 줄기 안 들어와 건물 밖으로 나가니 쨍한 햇빛에 눈이 부셨다.



여행 중 특별한 일이 없다면 해 떨어지고 숙소로 돌아와 쉬는데, 숙소가 불편하니 일찍 들어가 쉴 수가 없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자 낮에 공원 벤치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았다.


친구네 집이었다면 지하라고 이 정도로 당황하지는 않았을 거다. 인구밀도가 높은 서울에 온갖 형태의 집이 다 있듯, 서울과 비교하면 인구밀도가 낮아도 사람 몰리는 대도시이니 사람 사는 데는 똑같구나 했겠지. 지하라도 복도에서는 하늘이 보이게 만들어 놓은 건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며. 돈을 주고 묵는 여행자 숙소에서 기대하지 못한 형태이고, 숙소 설명에 나와 있지 않았던 정보라 당황했을 뿐.


단지 여행자 숙소를 하기에 일반적으로 적합하다 여겨질 공간은 아닌데도 이 도시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뭐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 조금 서글펐달까. 하지만 후기에서 좋은 평가 받은 건 이해할 수 없다.


체크아웃하고 말라가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후기를 남겨 달라고 에어비앤비에서 메시지가 왔다. 일반 여행자 숙소라면 다음 여행자들 참고하리고 솔직하게 쓰겠지만 어지간히 나쁜 일을 겪지 않고서야 삼 일 간 얼굴 보고 지낸 호스트가 직접 읽는데 어떻게 부정적인 말을 쓰겠나. (아, 이래서 후기가 다 나쁘지 않았던 건가?) 후기를 쓰지 않는 것으로 나의 평을 대신하려고 했는데 어제 호스트한테 Whatsapp으로 메시지가 왔다. 에어비앤비에 후기를 좀 써달란다. 하아...


숙소 선정으로서는 실패했지만 마드리드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었고 이 또한 에어비앤비였기에 가능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후기는 못 써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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