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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Nov 03. 2019

론다에서 하룻밤 묵어야 할 이유

론다에 간다면 양상추를 드세요



론다에 다녀왔다.


100미터 깊이의 타호 협곡으로 나뉜 내륙 평원에 자리해 말라가 주에서 가장 장엄한 경관을 선보인다는 곳.

론다도 말라가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이지만 지난 네르하 여행 때의 아쉬움을 기억하고 이번에는 일박을 하기로 했다.

                                 

이번 론다 여행 숙소도 에어비앤비. 지난 마드리드 여행 때 지하 숙소에서 삼 일간 힘들었던 경험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숙소 뷰고르는 데 신경 좀 썼다. 외벽이 새하얀 전통 안달루시아 집은 무려 삼 층짜리. 내가 묵는 층만 해도 방이 세 개다. 다른 도시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이 쓰던 방이라 책이며 어릴 때 가지고 놀던 프라모빌이 그대로 있다. 꼭 시골 친척 집에 놀러 온 것 같다. 한 층 아래 거실로 내려가니 눈앞에 펼쳐지는 전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숙소에서 보이는 풍경

            

                      

아직 본격적으로 구경도 하기 전인데 이미 오늘 분 관광은 끝낸 것 같다. 론다 파라도르가 전망이 끝내준다는 데 거기 부럽지 않다. 매일 눈 떴을 때 이런 풍경이 보이는 곳에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매일 보면 이것도 흔한 동네 풍경처럼 보일까?


*파라도르(Parador): 성을 개조해서 만든 스페인 국영 호텔


방 몇 개를 더 에어비앤비로 내놓는지 내가 오고 얼마 후 한 호주 커플이 들어왔다. 그런데 아주머니께서 그 커플을 대하는 태도가 나한테 한 것과는 어째 좀 다르다.



아주머니: 어느 나라에서 왔니?

나: 한국에서 왔어요.

아주머니: (잠깐 한눈팔다가) 아, 미안. 어느 나라라고?

나: 한국이요. 그런데 지금 말라가에서 일해요.

아주머니: 아, 그렇구나.



그러고는 대화 종료, 집 설명 시작이었다. 어쩐지 좀 무뚝뚝하고 형식적이다 싶었지만 원래 그런 성격인가 보다 했다.


호주 커플들에게는


아주머니: 어느 나라에서 왔니?

호주 커플: 호주에서 왔어요.

아주머니: 아, 호~~주! 거기 정말 아름답다고 하던데!


라며 엄청 호들갑스럽게 반응하시더니, 스페인에는 처음이니, 어디어디 갔니, 어디에는 꼭 가야 한다부터 시작해 갑자기 자기 개인사 읊기 시작. 나는 원래 프랑스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스페인 사람이고 어머니는 프랑스 사람이라서 사실 혼혈이고, 내가 언제부터 여기 살기 시작했고, 선생님 일을 하고 있고 어쩌고저쩌고하며 문 앞에서 오 분 넘게 떠드신다. 그리고 열쇠 주면서 문 열 때 이렇게 하면 잘 안되니까 이렇게 열어야 한다며 시연에 설명까지 하는데 그건 나한테 말 안 했는데..?


멀리서 그들 대화를 듣고 있으니 설명할 수 없는 싸함이 올라온다. 왜 태도가 저렇게 다르지? 이거 설마 인종차별... 에이, 너무 나갔다. 단순히 한국에 대해 잘 모르고 호주는 익숙한 나라라서? 아까는 청소를 덜 끝낸 상태라서 바빠서? 아니면 그냥 그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매력적이라서? 온갖 생각이 올라왔다가 별것도 아닌데 내가 너무 예민한건가 싶어 털어냈지만 찝찝함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랬는데 저녁에 돌아와서 나만 수건 안 준 거 보고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이런 종류의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예민한지 먼저 생각하는 건 맞는 걸까?  


아무튼.... 숙소에서 나와 론다의 명물 누오보 다리를 보러 갔다. 협곡에 길게 걸쳐져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마침 이날이 공휴일인 금요일이라 다리 위는 놀러 온 현지인들로 바글거렸다.

              


론다의 명물, 누오보 다리


             

타호 협곡 위에 세워진 집들



                               

구시가지 구경.

                  

        

                            

이런 풍경이 펼쳐짐. 날이 살짝 흐려서 더 운치 있다.

    

                                          

구시가지를 지나가다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 앞에 멈췄다.


Casa del Rey Moro. 무어 왕의 집? 안에 정원도 있고 협곡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다길래 얼떨결에 입장료 6유로를 내고 들어갔다. 이슬람 스타일 타일이 붙어 있는 자그마한 정원을 지나 아랍어로 무언가 쓰인 구멍으로 다가가니 Water mine. 수뢰? 가 나온다. 일단 들어가 본다.            


                                    

내려가고 내려가고 또 내려가다 보면 머리로 물이 뚝뚝 떨어지고 그 물이 고인 계단은 축축하다. 가도 가도 끝이 나오지 않아 다시 올라가 말아 고민하는 찰나 아래에서 헉헉거리며 사람들이 올라왔다, 앞에 가던 스페인 가족의 아저씨가 올라오는 사람에게 밑에 뭐가 있냐 물어보았다. 그분은 가쁜 숨을 내쉬며 강이 있다고, 예쁘고 가볼만하다고 대답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다시 힘을 내서 아래로 또 아래로 내려갔다. 15층 정도는 내려오지 않았을까 싶을 때쯤 도착헸다.

                    



                                     

강이 등장했다. 협곡의 제일 끝까지 내려온 것. 아까 그 가족의 아저씨는


"아주 예~~쁘네, 매우 올만한 가~~치기 있었네."


밥 먹고 내려온 건데 올라가서 다시 밥 먹어야겠다며 시종일관 투덜투덜거리셨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시는 것 같아서 왠지 시원했다.

               

                                   

내려가는 건 어찌어찌 내려왔는데 올라갈 때 숨넘어가는 줄 알았다. 계단은 또 얼마나 높은지 몇 걸음 걷다 쉬고 걷다 쉬기를 무한 반복하다 보니 드디어 하늘이 보인다.


청바지에는 고인 물이 튀어 흙이 굳어 있다. 6유로 내고 운동하고 온 기분이지만 정원에서 내려다보는 론다의 풍경은 좋았다.          


이런 뷰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다음에 오게 되면 그냥 여기 테라스 카페로 바로 와서 전망 구경한 할래.                


Casa del Moro의 테라스 카페



                                

파라도르 호텔에서 묵지 않아도 호텔 앞 테라스 카페에서 누에보 다리를 볼 수 있다. 흐려서 석양이 없을 것 같기는 했지만 테라스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여섯 시쯤 이랬던 풍경이             


                         

한 시간 후 이렇게 바뀌었다.               


                                        

누에보 다리에는 불이 들어오고

             


                            

나는 추워서 숙소로 돌아갔다.


호스트 아주머니께서 숙소 근처에 Le Chuguita라고 타파스 한 접시에 0.9유로인 유명한 타파스 집이 있다고 알려주셨는데 낮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이 빡빡했다. 저녁 시간에 맞춰 다시 도전하러 가니 아직 저녁 오픈 전이다. 숙소에 들어가서 히트텍을 껴입고 잠시 쉬다가 여덟시 반 오픈 시간에 맞춰서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벌써 사람들로 꽉 찼다.


Le Chuguita 타파스 집

                                      

이미 테라스와 실내 테이블은 자리가 없고 대부분은 바에 서서 먹고 있다.  조금 조금씩 비집고 들어가서 바 앞에 자리를 잡고 섰다. 맥주 한 잔과 구글맵 식당 정보 사진에 많이 떠 있던 양여기저기 놓여 있는 메뉴 종이를 한 장 찢어 원한는 것을 체크한 뒤 이름을 써 카운터에다 내고 주문하는 모양이다. 송이 구이와 빵 위에 염소치즈 올린 걸 주문했다.



                         

맥주 바닥이 보일 때쯤 내 타파스가 나왔다. 양송이부터 한 입. 맛있다! 간도 적당하고 버섯 육즙이 식욕을 돋운다. 양송이는 마드리드에서 한국인들에게 유명한 타파스 집에서 먹어본 적 있는데 그 집보다 훨씬 맛있다. 이번엔 염소치즈 타파스. 사진상으로는 빵 위에 치즈가 올려져 있던데 비스킷에다 나왔네. 치즈 위에는 매운 토마토소스랑 올리브유가 뿌려져 있는데 이것도 굿! 


고기와 해산물을 안 먹으니 내가 먹을 수 있는 타파스 종류가 한정적이라 지금까지 늘 튀긴 감자에 매운 토마토소스를 뿌린 파타타스 브라바스나 고추를 튀기듯이 구워 소금을 친 삐미엔타스 빠드로네스만 주문하고는 했다. 고기, 해산물이 아닌데도 먹을 수 있는 타파스를 발견하고 또 그게 맛있어서 기분이 급격하게 좋아졌다.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과 잔뜩 신나 떠들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끼여 있으니 이 공간과 시간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구성원이 된 것 같다. 혼자가 아니라 여기 있는 사람들이 함께 먹고 마시는 것처럼.

첫 번째 타파스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뭘 좀 더 먹어볼까 사람들이 먹는 걸 살펴보니 테이블 여기저기에 양상추가 올라와 있다. 샐러드도 아니고 양상추만 포기째 무슨 맛으로 먹나 생각하다 문득 이 집 이름이 Le Chugita인 게 떠올랐다. Le Chughita,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 가만, 붙여서 발음하면 Lechuguita, 양상추? 그렇다. 이 집 이름은 양상추고 양상추는 이 집의 시그니처 메뉴였던 것이다! 당장 양상추를 주문하고 맥주도 한 잔 더 시켰다. 

함께 나온 칼로 잎사귀를 하나 잘라먹어보았다. 아니, 양상추에 무슨 짓을 한 거지? 무슨 양념을 뿌려 놓았는지 새콤하고 짭조롬하고 그야말로 술안주다. 맥주가 술술 들어간다. 마지막에 식당 이름의 비밀을 푼 게 천만 다행이다 싶은 맛이었다.



텍스트 추가                    


여러분, 론다에 가면 양상추를 드세요! 두 번 드세요!



맥주 두 잔에 물 한 병, 타파스 네 개를 먹었는데도 6.6유로밖에 안 나왔다. 

                  

론다는 정말 예쁘지만 오후에는 살짝 지루해져서 굳이 일박할 필요는 없었나, 야경 보고 여덟 시 차로 돌아갈 걸 그랬나 싶었는데 이 식당 하나만으로 론다에 머물 이유는 충분했다. 한껏 올라간 텐션을 조금씩 끌어내리며 숙소로 돌아갔고 카페에서 읽던 정류진의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을 마저 읽고 잠들었다.

                


고놈 참 잘 생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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