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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Nov 08. 2019

스페인에서 채식하기1

장보기와 집밥 편



요즘 먹는 것에 영 시큰둥하다. 어딜 가나 잘 먹는다 소리 듣고 식욕이 없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모르고 살아온 지 오래라 이런 변화가 당황스럽다. 그것도 미식의 나라 스페인에 와서 말이다. 여기 음식이 입에 안 맞는 것도 아니고 한국 음식이 그리운 것도 아니다. 굶고 지내는 것도 아니고 매끼 잘 챙겨먹고 산다. 단지 하루 종일 먹을 것만 생각하고 요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던 때와 비교했을 때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이 확실히 줄어들었달까.


시월이지만 낮에는 30도까지 올라가는 기후에 몸이 적응하는 과정인 걸까. 아니면 이게 정상적인 건데 그간 너무 먹을 것에 집착했던 걸까. 재작년 겨울부터 시작해서 늘 허기가 졌다. 늘 입에 뭔가 달고 있어야 했따. 적당할 때 끊는 법도 모르겠고 끊을 수도 없었다. 늘 유지해오던 체중에서 5kg 가량이 쪘고, 다이어트 비슷한 것도 시도해 봤지만 1g도 빠지지 않았다.


그랬는데! 스페인에 와서 매끼 다 챙겨 먹고 간식도 먹는데 2kg이나 빠졌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활동량이 좀 늘었다는 것과 그 이상한 허기가 사라졌다는 것뿐이다. 아직까지 궁금하다. 도대체 그 이상한 허기는 어디서 왔던 걸까.


여전히 슈퍼마켓 구경하는 것은 재미있고 장 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요리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는 음식을 최소한의 조리로 먹고 살고 있다.



시장(Mercado)


어제는 요가 수업 끝나고 바로 근처에 있는 Mercado Atarazana 시장에 다녀왔다.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만 여는 상설 시장인데 채소, 과일, 각종 절임 올리브, 견과류 등등 없는 게 없다. 늘 현지인들과 관광객들로 활기가 넘치는 곳이다.

            

              

다양한 버섯 종류
말린 과일

                        

                                      

토마토, 적양파, 주끼니 호박 이렇게 세 개가 1유로. 가운데 있는 건 물렁물렁하고 달달한 하얀 속살이 있는 열대 과일 치리모야. 어떤 과일 가게 앞에 현지인 할머니들이 몰려 있길래 여긴 분명 과일 맛집이 분명하다 판단하고 갔는데 역시나였다. 주인아주머니께서 과일 하나도 어찌나 꼼꼼하게 골라주시는지. 집에서 먹어보니 맛 또한 최고였다.




마드리드에 사는 친구가 샤인머스캣 같다며 꼭 먹어보라고 한 씨 없는 청포도는 알이 엄청 굵고 달다. 샤인머스캣이 한 송이에 이만 원 돈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건 한 송이에 이 유로! 샤인머스캣 한 송이 값으로 열 송이를 먹을 수 있지요.         



                                                 

마트(Supermercado)


올리브 많이 나는 나라의 슈퍼마켓 올리브 코너 한번 구경하세요. 여기부터 더 끝까지 싹 다 올리브. 하지만 시장에 가면 더 다양한 종류의 올리브를 싸게 구할 수 있다.





올리브유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부터 저끝까지가 다 올리브유. 여기 사람들은 아침 식사로 구운 빵 위에 올리브유를 뿌리고 소금을 쳐서 먹기 때문에 카페 테이블 위에는 항상 올리브유가 구비되어 있다. 정말 재미있는 건 지금까지 들른 여러 군데의 카페 중 단 한 군데도 같은 올리브유를 쓰는 곳이 없었다는 것. 여러 카페에서 동시에 쓰는 게 있다면 그게 좋은 브랜드겠거니 하고 한번 써보려고 했는데. 쩝. 올리브유 종류가 워낙 많으니 겹칠 일이 없나 보다.





스페인은 오렌지가 정말 싸다. 그리고 마트에 가면 먹는 오렌지와 주스용 오렌지를 따로 판다. 그리고 마트마다 꼭 오렌지 착즙기가 있어서 그자리에서 신선한 오렌지를 짜서 공병에 담아갈 수 있다.                 



                                    

빠에야에 들어가는 고급 향신료 사프란도 엄청 많고요. 수업 시간에 간접화법 공부하다가 학생들에게 "투어 가이드가 말라가 사람들이 빠에야를 안 먹는다고 했어요. 보통 관광객들이 먹는다고 했어요." 라고 예시를 만들어 줬더니 식당은 주로 관광객 대상으로 하는 게 맞지만 집에서는 많이들 만들어 먹는단다.               





비건 식료품점


몇 주전 한창 집 구하러 다닐 때 우연히 비건 식료품점을 발견했다! 비건 치즈, 대체육, 템페, 두부 등등, 비건 과자 등 비건 식료품뿐만 아니라 제로 웨이스트를 위한 주머니도 팔고 대나무 칫솔에 비건 색조화장품도 있다.


다양한 비건 치즈


비건 화장품



                             

10월 4일 세계 동물의 날을 기념해서 오늘 전 품목 15퍼센트 할인 행사를 한다고 해서 다녀왔다. 반가운 템페와 코코넛으로 만든 비건 모짜렐라 치즈, 아침에 먹을 오트밀, 그리고 타마리 간장을 데려왔다.


타마리 간장은 초밥이나 데리야키에 쓰이는 1년 숙성시킨 고급 간장인데 뉴욕 여행할 때 신세진 오보 베지테리언 친구가 사용하는 것을 보고 처음 알게 됐다. 안 그래도 아직 간장이 없어 사려던 참이어서 할인하는 김에 냉큼 집었다.

           

          



비건 식료품점까지 가지 않아도 El Corte ingles 같은 백화점 식료품점에 가면 비건 관련 제품들을 꽤 많이 파는 것을 볼 수 있다. 비건 아이스크림부터 해서 비건 마요네즈, 비건 만두까지!                                

                   


스페인의 채식 인프라는, 장 볼 때는 확실히 한국보다 더 낫다.(나는 아직 말라가 말고 다른 도시에 가 본 적은 없지만 말라가는 그렇다.)


일단 채소 과일이 다양하고 저렴하며 두유나 아몬드유 같은 대체 유제품도 종류가 많고 싸다. 비건 전문 식료품점도 몇 개 있고, 고급 마트에 가면 채식 햄이나 콩고기, 두유 요구르트 같은 것도 판다. 채수팩도 팔고.



마트에서 아호 블랑꼬(Ajo Blanco)를 사 봤다. 아호 블랑꼬는 아몬드, 레몬, 식초, 올리브유, 마늘, 식빵 넣고 갈아 차갑게 먹는 안달루시아 지역의 수프이다. 처음에 색깔이 하얗길래 우유가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아몬드 때문에 하얀 거였다. 식빵도 들어 있어서 은근 든든하다.                  


 


안에 쌀하고 말린 버섯과 채소가 다 들어있어서 그대로 넣고 조리하면 끝. 초반에 이런 거 많이 먹었습니다

                 



                                                           

Natura 라고 하는 자연주의 물건들 파는 곳에서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             


                     

'도전 비건 30일' 이라고 네모난 상자 안에 비건 요리 일러스트와 요리법이 들어 있고 하루에 하나씩 뽑아서 볼 수 있다. 비건뿐만 아니라 요가, 미니멀 라이프, 행복, 사진 등등 30일 동안 도전해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주제가 있는데 다 재미있어 보였지만 하나에 거의 10유로라 일단 비건 먼저 데려 왔다.

             




Ama los animales.Come plantas.

동물을 사랑하고 식물을 드세요.

라고 쓰여 있다.   


앞면에는 요리 이름과 귀여운 일러스트, 뒷면에는 재료가 쓰여 있다. 레시피는 없고 재료밖에 안 나와 있어서 으잉 했는데 위에 아주 작게 레시피를 볼 수 있는 링크도 적혀 있다.


첫 번째로 뽑은 건 '퀴노아 타불레'.                       


             

타불레는 삶은 퀴노아에(일반적으로는 쿠스쿠스로 만든다)와 토마토, 오이, 적양파, 파슬리, 민트나 박하를 잘게 썰어 섞고 레몬즙과 올리브유를 두르고 소금과 후추를 쳐서 먹는 중동식 샐러드이다. 마침 집에 퀴노아도 있고 시장 갔을 때 토마토, 적양파, 오이(인줄 샀는데 주끼니 호박이었다), 파슬리 박하까지 한 큐에 다 사 와서 뚝딱해먹었다. 박하잎이 들어가서 상큼함이 일품.

             




                        

하루는 현미쌀에 렌틸콩 넣어 밥하고 피망과 고추의 중간단계쯤 되는 pimienta dulce와 양송이버섯 볶아 소금치고, 샐러드에 레몬즙 짜넣고 올리브유 두르고 끝. 하얀 건 위에서 언급한 차가운 수프 아호 블랑코. 차리는 데 10분도 안 걸렸다.

               


                              

파스타면 삶아서 남은 잎채소랑 석류 남은 거 올리고 바질 페스토 한 스푼 넣고 섞어 먹은 한 끼. 이것도 불에 조리한 건 파스타 면밖에 없고요.                    


                          


이사오기 전 묵었떤 숙소에서도 종종 요리해 먹었따. 토마토와 레몬, 올리브유, 식초, 식빵을 갈아서 만든 안달루시아 지방의 차가운 수프 살모레호(salmorejo)와 옥수수, 구운 고추. 역시나 요리한 건 고추가 끝.

             


                     


   

양송이와 아스파라거스, 블랙 올리브 넣고 토마토 소스 부어 만든 매우 심플한 파스타.



                      

버섯 리조뜨처럼 한 번에 조리할 수 있게 말린 채소들과 향신료가 다 들어있던 쿠스쿠스로 5분 조리하고, 통조림 병아리콩에 블랙올리브, 여기도 요리한 건 구운 고추뿐.



                                   

다 요리하는 데 10분 이상 안 걸리는 것들이라 매우 민망. 오븐 생겼다고 좋아할 때는 언제고 인덕션에 불 들어오는 것도 잠깐이니. 바르셀로나에 살았던 친구에게 눈이 번쩍 떠질만큼 맛있는 스페인 음식 뭐 없냐 물었더니 생각나는 건 다 고기래. 아무래도 한국 사람이니 김치 먹으면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지 않겠냐는데 그럴 것 같기도 하고. 김치를 좀 먹으면 미적지근해진 음식에 대한 내 사랑 다시 돌아오려나.


다음 미션은 아시아 마트에 가 보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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