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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Dec 09. 2019

코르도바에서 배터리가 나가고



스페인은 금요부터 월요일까지 공휴일이 두 개가 끼인 황금연휴 기간이다. 연휴가 4일이나 되어 어디를 다녀올까 하다가 2주 후면 크리스마스 방학과 함께 긴 여행이 시작되니 이번에는 말라가에서 시간을 보내며 쉬기로 했다. 그래도 아무 데도 안 가기는 조금 아쉬우니 가까운 거리의 코르도바에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말라가에서 코르도바는 버스 시간대별로 2시간에서 3시간 정도 걸리는데 버스 첫 시간은 코르도바에 2시에 도착하고 코르도바에서 말라가행 마지막 버스는 오후 6시 출발이라 당일치기로 하기엔 시간이 애매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다가 blablacar이라는 유럽의 카풀 서비스를 발견해 이걸 이용해 보기로 했다. 여행할 날짜와 출발지, 목적지를 입력하면 그날 카풀을 구하는 운전자의 프로필과 운행 시간이 뜬다. 우버처럼 운전자들의 운전 이력과 탑승자들의 평점, 후기도 상세하게 나와 있다.


버스보다 일찍 출발해서 늦게 돌아올 수 있는 데다가 가격도 버스보다 저렴하다. 정차하는 곳이 없으니 시간도 훨씬 적게 걸린다. 편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코르도바에 갈 때는 말라가에서 일하거나 공부하고 있는 코르도바 출신 탑승객들과 함께했고, 말라가로 돌아올 때는 말라가, 코르도바 주말부부, 말라가에 있는 남친을 만나러 가는 탑승객과 함께 했다. 다들 현지인들이라서 차에 타고 가는 동안 현지인들의 삶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도 되어 여러모로 좋았다. 앞으로 근교 지역 여행할 때 애용하게 될 것 같다.


이야기 나누다 창밖에 광활하게 펼쳐진 올리브 밭 구경하다 꾸벅꾸벅 졸다 보니 한 시간 반 만에 코르도바에 도착했다. 코르도바는 말라가보다 춥다던데 날씨가 화창했다. 입고 온 코트를 벗어도 될 정도였다.


기차역 근처에서부터 기다랗게 난 공원을 따라서 걷다 보니 Puerta de Almodovar란 기다란 성벽과 함께 문이 등장했다. 그 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마치 시간여행하는 것처럼 중세 느낌의 좁다란 골목길이 펼쳐졌다. 예전에 말라가 free walking tour할 때 들은 설명에 의하면 사막이 많은 무슬림 국가에서는 그늘을 확보하고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이렇게 좁은 골목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무슬림 지배 역사가 긴 안달루시아 지역에서 이런 좁은 골목을 많이 볼 수 있다 한다.




새하얀 벽에 다닥다닥 걸린 제라늄 화분이 사랑스럽다. 4월에서 5월쯤 코르도바에서 파티오 축제가 열리는데 그때 오면 잘 가꾸어진 꽃이 만발한 파티오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걷다가 코르도바 대학 건물에 문이 열려 있어 호기심에 들어가 봤다. 대학교가 아니라 꼭 중세 박물관에 온 것처럼 낡고 오래된 건물이 매우 고풍스럽다. 타일로 붙여 놓은 강의실 번호와 화장실 표시까지도 멋스럽다. 역시 역사와 전통의 도시는 대학교도 다르다며 감탄했는데 돌아올 때 카풀한 코르도바 대학생이 구시가지에 있는 그 건물만 특별한 케이스고 다른 건물들은 완전 신식이라고 알려 주었다.






왼쪽은 강의실, 오른쪽은 화장실 표시



코르도바 대학교에서 나와 갑자기 사람들이 많아졌다 싶을 즈음 메스키타가 등장했다. 스페이어로 모스크라는 뜻이고, 코르도바 산타 마리아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메스키타는 무슬림 지배 시절 세워진 모스크를, 기독교인들의 코르도바 정복 후 대성당으로 바꾼 곳이다.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나오는 정원에는 오렌지나무가 가득 심겨 있다. 색이 선명한 오렌지 알알이 달린 나무가 싱그럽다.10분 정도 줄을 서서 표를 사서 안으로 들어갔다.


성당은 그게 그거 같은 무식한 1인인데 메스키타 안에 들어가자마자 입이 떡 벌어졌다.



성당이 어니라 무슨 로마 유적지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아치 모양 기둥에, 기다란 복도 끝 갑자기 웅장하게 등정하는 가톨릭 예배당, 그리고 다시 걸어가면 나타나는 아랍어가 새겨진 황금빛 모자이크가 박힌 모스크 기도실까지, 이슬람과 가톨릭 요소가 혼재되어 정말로 묘하고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반대로 가톨릭 성당을 모스크로 개조한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 성당(정식 명칭은 아야소피아 박물관)이 떠오르기도 하고.


말발굽 모양의 아치




입장료가 10유로로 꽤 비싼 편이었지만 아깝지 않았다. 나는 가이드북의 설명에 의존해서 구경했지만 이왕이면 투어를 신청해서 가이드의 설명을 꼼꼼하게 들어도 좋을 것 같다.


모스크 첨탑을 바로크풍의 종탑으로 만든 알미나르 탑에 올라가면 코르도바 시내 대부분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입장 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건지 들어갈 수 없었다.



알미나르 탑


800년 가까이 무슬림의 지배를 받기도 했고, 모로코와도 매우 가까운 말라가에서도 아랍식 찻집이라든가, 아랍식 목욕탕, 터키 등 같은 기념품 파는 곳이 꽤 많은 편인데 코르도바에서는 좀 더 쉽게 마주칠 수 있었다. (안달루시아 지역 자체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 같기는 하다)


Salon de té라고 유명한 아랍식 찻집이 있다고 해서 가 보았다. 관광객들을 타깃으로 하는 곳 같기는 했지만 잘 꾸며놓은 파티오도 근사하고 작은방과 테이블, 소품들은 아랍 분위기를 느껴보기에 충분했다.





이 사진을 찍고 배터리가 나갔다. 나는 왜 매번 여행 갈 때마다 배터리 문제가 생기는 걸까. 보조배터리를 빼먹고 안 가져갔다거나, 가져간 보조배터리가 충전이 안 되어 있었다거나, 보조배터리는 충전이 되어 있는데 연결 잭을 잘못 가져갔다거나, 휴대폰 충전기를 아예 안 챙겨갔다거나 하는 뭐 이런 일들. 이번에는 보조배터리는 가져갔는데 충전이 되다 만 문제..ㅋㅋ


사람마다 유독 '멍청지수'가 높은 영역이 하나씩 있다 한다면 나는 휴대폰이 딱 그 영역인 것 같다. 다행히 도시가 작아서 구글 지도가 딱히 필요하지는 않고, 사진도 못 찍으면 눈으로 담으면 되지 뭐 싶었는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돌아갈 때 blablacar를 이용해야 하는데 아직까지 운전자한테 정확한 픽업 지점을 공지 받지 못한 것이다. 배터리가 나가기 전에 연락을 했지만 답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런 일을 대비해서 전화번호를 미리 공책에다 옮겨 적어놨지! 길 가다 공중전화 있으면 전화 걸어보면 되지 생각하며 구글 지도 없이, 카메라도 없이, 휴대폰에 의존하지 않고 온전히 내 몸과 눈으로 도시를 구경했다.


시간이 다 되어 기차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인구밀도가 높아졌다. 사람들을 따라가보니 신시가지가 나왔다. 각종 브랜드숍이 줄지어 있는 그리 예쁘지 않은 길을 따라 걸으니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려 있는 광장이 나왔다. 딱히 구경할 거리는 없었는데 가족과 함께 나온 현지인들로 바글바글했다. 코르도바 구시가지 신시가지 관광객 현지인 모두 구경했으니 이제 기차역으로 돌아갔다. 기차역 주변이 꽤 넓어서 어디에서 픽업한다는 건지 대체 모르겠고, 공중전화는 어디에도 없고,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전화 한통 써도 되냐고 부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차마 입이 안 떨어진다.


결국 휴대폰 액세서리 파는 가게에 들어가서 중요한 전화를 해야 하는데 휴대폰 배터리가 나갔다, 돈을 내고 가게 유선 전화를 좀 써도 되겠냐 했더니 흔쾌히 그러라고 해서 카풀 운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차역이 아닌 건너편 버스 터미널 쪽의 택시 정류장에서 보자고 해서 그쪽으로 갔는데 우버처럼 차량 번호를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아 차가 왔을 때 알아볼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때 내 옆에서 캐리어를 들고 몇 분째 서 있는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와 혹시나 같이 카풀하는 분인가 싶어서 물어보니 맞단다. 차가 막혀서 오분쯤 늦을 거라고 연락이 왔단다.


그렇게 무사히 카풀 차량을 만나서 말라가로 돌아왔다. 작은 여행이 끝나고 말라가로 돌아올 때마다 하는 나의 루틴은 기차역 앞의 중국집에서 중국음식을 먹는 것. 레몬 맥주와 함께 매콤한 중국요리를 한 접시 비우며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가 된 것 같다. 하지만 이틀 더 휴일이지롱.더 놀아도 된다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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