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부터 슬슬 따뜻해지더니 이제 공기 중에 찬 기운이 완전히 가셨다. 며칠 전부터 겨울 코트를 벗었고, 낮에는 심지어 더웠다. 최근 슬슬 기운이 난다 했더니, 이게 다 겨울이 가고 있어서였던 거다! (계절 심하게 타는 편)
스페인 남부 지방의 겨울은 한국과 비교했을 때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갈 때 정도의 기온이지만, 춥다고 하기도, 안 춥다고 하기도 애매한 이상한 추위가 있다. 햇빛은 쨍하지만 공기는 축축하고, 실내는 난방을 잘 안 해서 으슬으슬한, 한여름에 바다에서 수영하다 물에서 막 나왔을 때의 느낌이 종일 유지된달까.
한국 겨울은 밖은 정신이 얼얼할 정도로 추워도 어디든 실내만 들어가면 순식간에 따뜻해지지만, 여긴 강도 약의 추위를 종일 끌고 가는 기분이라 체감상 겨울이 더 길게 느껴졌다.
날이 풀리니 도시 분위기도 달라졌다. 말라가를 대하는 내 태도가 바뀌었다고 보는 게 맞겠다. 오래 사귄 연인처럼 권태로웠던 이곳이 묘하게 낯설고 처음 봤을 때처럼 설레기까지 한다.
여태껏 스페인 식사 시간에 적응 '안'하고 꿋꿋이 내 식사 시간을 고수하고 있던 나지만 오늘은 완벽히 스페인 사람처럼 밥을 먹었다. 일어나 간단한 아침 식사, 11시 시험 감독이 끝나고 비뚜포 꼰 또마떼로 요기 후, 3 시에 점심 먹고, 5시에 간식, 9시 가벼운 저녁. 이렇게 다섯 끼를 먹은 거다.
그간 스페인의 식사시간을 따르지 않아서 생활에 애로사항이 은근 많았다. 그런데 밥시간만 맞춰 줬더니 그다음 일정부터는 술술 풀리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이런 거다.
평상시: 수업 쉬는 시간인 10:30쯤 귤이나 바나나 정도의 간단한 간식을 먹고 1시쯤 점심을 먹는다.
오늘: 11시 반, 평소보다 더 무거운 간식인 피뚜포 빵에 간 토마토를 올려먹었더니 1시에 배가 고프지 않았음. 그래서 세 시 점심 성공.
가 보고 싶었던 비건 식당 Te Siria에서 느긋한 점심.
Fatte라는 중동 음식을 시켜 봤다. 병아리콩에 두유로 만든 시큼한 소스를 섞고 아몬드와 석류를 토핑해 먹는 음식. 석류가 안 어울릴 것 같지만 톡톡 거리는 식감을 줘서 은근 괜찮았다.
근처 서점에서 Dele 책을 사고 (올해 목표는 DELE B2를 따는 것)
2:00~5:00 문을 닫아서 갈 때마다 허탕 쳤던 작은 소품 가게 구경.
스페인, 특히 남부 쪽은 2시에서 5시 사이에 쉬는 가게가 많다. 천천히 밥 먹고 낮잠도 자고 저녁 장사를 위해 에너지를 채운다.
비건 스콘을 파는 Julia bakery에서 커피에 스콘을 곁들여 독서. 커피가 제일 당기는 시간인 오후 세 시마다 여기가 생각나는데, 그때 딱 갈 수가 없으니 나를 미치게 하는 장소 중 하나. 카페인이 제일 필요한 시간대에 카페가 문을 문을 닫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아....!!
열기구 모형이 주렁주렁 달려 있고 지도와 지구본이 가득한 서점, 무려 1:30~5:00, 반나절을 몽땅 쉬어서 지금까지 한 번을 못 갔던, 이 서점 Mapas y compañia에 드디어 들어갔다! 다양한 지구본과 지도에 앤틱 소품, 그림책까지, 좋아하는 것들로 꽉꽉 채워진 이 매력적인 곳을, 그놈의 밥시간 때문에 이제야 오게 되다니 이렇게 억울할 수가.
사고 싶은 그림책도 너무 많고, 지도도 갖고 싶고 주체 못 하고 핑핑 돌아가던 눈이 '말라가'라는 이름 앞에 딱 멈췄다. 말라가에 대한 그림책인데 책 뒤쪽에 이 서점 이름이 있네? 사장님께 여기에서 만든 책이냐고 물어보니, 말라가 출신 건축가가 책을 섰고 서점과 같이 펴낸 책이란다. 말라가 출신 작가가 말라가에 대한 내용을 말라가 서점이랑 만들었다니 안 살 수가 있나.
책에는 말라가의 이것저것에 대한 스케치와 함께 스페인어로 간단한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내 습관 버리고 스페인 사람처럼 밥 먹고, 시간을 보냈더니 그동안 벌어져있던 톱니가 딱 맞물리며 시원하게 굴러간 것 같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