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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Feb 05. 2020

하루는 스페인 사람처럼 먹어 보기





지난주부터 슬슬 따뜻해지더니 이제 공기 중에 찬 기운이 완전히 가셨다. 며칠 전부터 겨울 코트를 벗었고, 낮에는 심지어 더웠다. 최근 슬슬 기운이 난다 했더니, 이게 다 겨울이 가고 있어서였던 거다! (계절 심하게 타는 편)



스페인 남부 지방의 겨울은 한국과 비교했을 때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갈 때 정도의 기온이지만, 춥다고 하기도, 안 춥다고 하기도 애매한 이상한 추위가 있다. 햇빛은 쨍하지만 공기는 축축하고, 실내는 난방을 잘 안 해서 으슬으슬한, 한여름에 바다에서 수영하다 물에서 막 나왔을 때의 느낌이 종일 유지된달까.


한국 겨울은 밖은 정신이 얼얼할 정도로 추워도 어디든 실내만 들어가면 순식간에 따뜻해지지만, 여긴 강도 약의 추위를 종일 끌고 가는 기분이라 체감상 겨울이 더 길게 느껴졌다.


날이 풀리니 도시 분위기도 달라졌다. 말라가를 대하는 내 태도가 바뀌었다고 보는 게 맞겠다. 오래 사귄 연인처럼 권태로웠던 이곳이 묘하게 낯설고 처음 봤을 때처럼 설레기까지 한다.



여태껏 스페인 식사 시간에 적응 '안'하고 꿋꿋이 내 식사 시간을 고수하고 있던 나지만 오늘은 완벽히 스페인 사람처럼 밥을 먹었다. 일어나 간단한 아침 식사, 11시 시험 감독이 끝나고 비뚜포 꼰 또마떼로 요기 후, 3 시에 점심 먹고, 5시에 간식, 9시 가벼운 저녁. 이렇게 다섯 끼를 먹은 거다. 


말라가에서 이렇게 생긴 빵을 삐뚜포(oitufo)라 부르고 아침에 많이 먹는다


그간 스페인의 식사시간을 따르지 않아서 생활에 애로사항이 은근 많았다. 그런데 밥시간만 맞춰 줬더니 그다음 일정부터는 술술 풀리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이런 거다.



평상시: 수업 쉬는 시간인 10:30쯤 귤이나 바나나 정도의 간단한 간식을 먹고 1시쯤 점심을 먹는다.


오늘: 11시 반, 평소보다 더 무거운 간식인 피뚜포 빵에 간 토마토를 올려먹었더니 1시에 배가 고프지 않았음. 그래서 세 시 점심 성공.




3:00 PM



가 보고 싶었던 비건 식당 Te Siria에서 느긋한 점심.


Fatte라는 중동 음식을 시켜 봤다. 병아리콩에 두유로 만든 시큼한 소스를 섞고 아몬드와 석류를 토핑해 먹는 음식. 석류가 안 어울릴 것 같지만 톡톡 거리는 식감을 줘서 은근 괜찮았다.





4:00:PM

근처 서점에서 Dele 책을 사고 (올해 목표는 DELE B2를 따는 것)




5:00 PM



2:00~5:00 문을 닫아서 갈 때마다 허탕 쳤던 작은 소품 가게 구경.

스페인, 특히 남부 쪽은 2시에서 5시 사이에 쉬는 가게가 많다. 천천히 밥 먹고 낮잠도 자고 저녁 장사를 위해 에너지를 채운다.




5:30 PM


비건 스콘을 파는 Julia bakery에서 커피에 스콘을 곁들여 독서. 커피가 제일 당기는 시간인 오후 세 시마다 여기가 생각나는데, 그때 딱 갈 수가 없으니 나를 미치게 하는 장소 중 하나. 카페인이 제일 필요한 시간대에 카페가 문을 문을 닫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아....!!







7:00 PM


열기구 모형이 주렁주렁 달려 있고 지도와 지구본이 가득한 서점, 무려 1:30~5:00, 반나절을 몽땅 쉬어서 지금까지 한 번을 못 갔던, 이 서점 Mapas y compañia에 드디어 들어갔다! 다양한 지구본과 지도에 앤틱 소품, 그림책까지, 좋아하는 것들로 꽉꽉 채워진 이 매력적인 곳을, 그놈의 밥시간 때문에 이제야 오게 되다니 이렇게 억울할 수가.


사고 싶은 그림책도 너무 많고, 지도도 갖고 싶고 주체 못 하고 핑핑 돌아가던 눈이 '말라가'라는 이름 앞에 딱 멈췄다. 말라가에 대한 그림책인데 책 뒤쪽에 이 서점 이름이 있네? 사장님께 여기에서 만든 책이냐고 물어보니, 말라가 출신 건축가가 책을 섰고 서점과 같이 펴낸 책이란다. 말라가 출신 작가가 말라가에 대한 내용을 말라가 서점이랑 만들었다니 안 살 수가 있나.





책에는 말라가의 이것저것에 대한 스케치와 함께 스페인어로 간단한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내 습관 버리고 스페인 사람처럼 밥 먹고, 시간을 보냈더니 그동안 벌어져있던 톱니가 딱 맞물리며 시원하게 굴러간 것 같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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