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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Apr 07. 2020

없는 대로 산다




지금 사는 집은 내가 한국에서 혼자 살았던 어떤 집보다 (내 기준에서) 좋고, 한국에서 살았던 어떤 집보다 없는 것도, 안 되는 것도 많다.



이릁테면 이런 것들이다.




잘 안 되는 것


온수 사용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따뜻한 물에 반신욕을 할 생각에 신나게 물을 받고 있었다. 이쯤이면 물이 다 찼겠지 하고 손을 넣었는데  물이 차다. 분명 따뜻한 물이 잘 나오고 있었는데? 그제야 욕실에 붙어 있던 안내문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에 온수 사용 제한이 있어 일정량 이상 사용하면 온수가 끊긴다는 거다.


.....


그렇게 반신욕도 못하고 아까운 물만 버렸다. 하긴, 지구의 많은 나라가 물 부족으로 고생하는데  반신욕이라니, 무슨 사치인가. 혼자 살아 어지간히 흥청망청 쓰지 않으면 온수 끊길 일은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샤워는 짧게-. 모두를 위해 물을 아껴 써서 나쁠 건 하나도 없다요.



전기 사용


한국에서 부모님과 친척들이 놀러 왔을 때였다. 온풍기를 틀어놓은 채로 이모는 한국에서 가져온 전기방석 위에 앉아 있었다. 그때 샤워하러 욕실에 들어간 친척이 온수가 안 나온다며 소리를 질렀다. 한참 찬물을 뺐지만 여전히 물이 차다며. 전력량을 초과했나 싶어 온풍기와 전기방석의 스위치를 끄니 그제야 온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집뿐만 아니라 여행 중에 묵은 에어비앤비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다.


한국에서 에어컨을 실컷 튼 여름 후 고지서 받을 때 아니고서야 전기를 많이 쓰고  있다고 자각할 일이 얼마나 있을까. 예전에 뭐 쓴 것도 없는데 전기가 나갔다며 툴툴거렸을 때도, 부엌 전구, 환풍기, 인덕션 두 개, 토스트기, 세탁기가 동시에 돌아가고 있었다. 이건 전기 사용이라고 생각도 안 했던 거지.


아, 여긴 전기세도 비싸다. 한국에서 전기세로 만 원 이상 내 본 적 거의 없는데  똑같이 살아도 여기선 30유로가 기본이다.



없는 것  


청소기


한국에서 살 때 청소기 없는 살림은 상상해 본 적 없다. 청소는 적당히 깨끗할 정도로만 하는 편이지만, 머리카락은 하루만 안 치워도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걸레질을 자주 안 할 거면 머리카락이라도 눈앞에서 치워야 '나는 깨끗한 집에 있다'라는 자기 최면이라도 걸 수 있으니까. 청소기만은 매일 돌리는 생활을 하다가 코스타리카에 갔다. 전임자 선생님께 물려받은 집에는 청소기 대신 내 키만 한 막대 빗자루와 밀대 걸레가 있었다.


학교 청소할 때나 사용하는 줄 알았던 비질과 밀대질은 금방 익숙해졌다. 비질에도 나름  미학이 있다.  하나는 소음이 없어 음악을 들으며 청소하기 좋다는 것. 또 하나는, 한 번에 윙 빨아들일 수 없고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쓸어 담아야 하기 때문에, 동작에 신중함이 더해진다는 것. 이거 은근 마음 챙김 명상이 된다고요.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창문을 열고 비질을 하는 생활을 하다가 한국에 돌아갔고, 다시 청소기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스페인에 와서 또 빗자루와 밀대 걸레를 만나 우아하고 신중하게 비질하며 살고 있다.



전자레인지


지금 사는 집은 전에 에어비앤비로 사용되어서 가구뿐만 아니라 웬만한 주방기기도 다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사 첫날 사용한 전자레인지는 작동하지 않았다. 집주인은 새것을 넣어주겠다고 했지만 딱히 많이 사용하지 않고 부엌 공간이 비좁아 그냥 치워달랬다.


자취생의 필수품이라지만  냉동식품도 잘 안 먹고 부엌 자리 차지하는 게 싫어서 한국에서도 없이 살던 터였다. 전자레인지가 있던 자리에는 소중한 2인용 전기밥솥을 놓았다. 가끔 냉장 보관해 놓은 밥을 데울 때 부재가 아쉽긴 하지만, 처음부터 밥은 그날 먹을 만큼만 짓고,  남아서 냉장 보관해야 한다면 그 밥은 볶음밥으로 사용한다.



전기포트


이사 온 지 며칠 안 됐을 때 물을 끓이려고 전기포트의 전원을 켠 순간 전기가 나갔다. 부엌이 아닌 다른 콘센트에서 시도해도  마찬가지. 그 전기포트가 문제인 건지, 일시적으로 전력을 많이 먹어서 그런 건지 알 수 없어, 쉬이 사기가 뭐 했다. 같은 일이 또 생길까 봐.


사실 직전 한국에서 살던 집에도 전기포트가 없었다. 역시 부엌이 비좁아지는 게 싫었기 때문. 대신 코스타리카에서 사 온 빈티지한 법랑 주전자를 유용하게 잘 썼다.


지금은 그냥 냄비에다 물을 끓인다. 한국에서 부모님이 오실 때 내 주전자를 가져오셨지만, 전기 인덕션이라 물이 빨리 안 끓어 티 주전자로 전락했다.  모양이 좀 안 나서 그렇지, 냄비에도 충분히 빨리 끓는다.  



토스트기


토스트기는 잘 쓰다 얼마 전에 고장 났다. 며칠 전 토스트기에 아침으로 먹을 빵을 넣고 버튼을 누르니 전기가 나갔다. 전기포트 때와 같은 증상이다. 아무래도 부엌 콘센트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 다시 해도 마찬가지.


요즘은 프라이팬에다 빵을 굽는다.  토스트기로 빵을 구울 때 팡 하고 튀어나오는 걸 보는 재미가 있지만, 프라이팬으로도 충분히 바삭하게 잘 구워집니다.


크게 비싼 물건들이 아니라 사려면 충분히 살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들이 없어도 별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공간도 덜 차지하는 건 덤.

있으면 편리하다고 생각한 많은 것들이, 사실은 없어도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았던 거였다.


없어도 괜찮을 물건을 하나 둘씩 빼다 보면, 꼭 곁에 둬야 할 물건은 과연 몇 개나 남을까.



이외에 번호키도 없고, 방충망도 없고, 인터넷 접속은 자꾸 끊기지만, 그것도 살다 보니 다~ 살아지더이다.


오늘도 난, 없는 대로, 고장 난 대로, 안 되는 대로 이 집과 함께 살아간다.




덧 1, 지난겨울 한국에서 온 가족과 친구들은 말은 안 했어도 적잖이 불편했을 듯.


덧 2, 인터넷 접속 종종 끊기는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만, 인터넷이 '안' 되는 격리 생활은 상상도 하기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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