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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May 05. 2020

격리 48일 만에 밖으로



48일간의 격리 생활 끝에 드디어 스페인에서 이동 제한 완화 조치가 실시됐다. 확진자 감소 추세를 봐 가며 4단계에 걸쳐서 진행되고 현재 0단계에서는 산책을 하거나 운동하는 목적으로 밖에 나갈 수 있다. 단 시간대별로  그룹이 나누어져  오전 6시부터 10시, 저녁 8시부터 11시까지는 건강한 성인, 10시부터 12시, 저녁 7시부터 8까지는 70세 이상이나 고위험군, 오후 12시부터 7시까지는 보호자를 동반한 아이들이 활동할 수 있다.  사람 사이 간격도 1~2미터 유지해야 하고.


운동복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섰다. 그동안 꼼수를 써서 조금 멀리 있는 슈퍼마켓까지 다니기는 했지만 그래봤자 집에서 1km 거리. 쇼핑 카트, 장바구니 없이 걷는 걸음이 이렇게 가벼울 수 없다. 4월에는 날이 흐리고 비가 잦더니 5월이 되자마자 기온이 28도로 훅 치솟았다. 복장도 격리 전 트렌치코트에서  민소매 차림으로 건너 뛰었다.


들어갈 수 없었던 구시가지 입구를 당당하게 지나 말라가에서 제일 좋아하는 열대 나무가 삐죽삐죽 솟아 있는 산책로를 천천히 걸었다. 4월을 통으로 집에서 보내며 봄을 잃어버린 것 같아 속상했는데 곳곳에 피어 있는 색색깔 꽃들에  금세 기분이 풀렸다.



지금 제일 흔한  꽃은 보라색 꽃나무 하카란다(jacaranda). 온 거리가 이 꽃의  독특한 향으로 가득하다

하카란다는 정말 매력적인데 사진으로는 도통 이 예쁜 보라색의 느낌이 안 산다

.


격리 전, 하루 평균 만 보는 기본으로 걸었는데 8000보 걸었다고 다리에 알이 배겼다. 등산을 한 것도 아니고 달리기를 한 것도 아닌데, 걸었다고 알이 배기다니!


오늘은  산책 마지막 타임인 저녁 8시에 나갔더니(요즘 해가 9시에 진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사람에 치여 1미터 거리 유지하기도 힘들었다. 무리를 지어 다니며 마스크로 없이 크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 어느 골목에서는 음악을 쩌렁쩌렁하게 틀어놓고는 윗집 아랫집 사람들이 발코니에 나와서 춤을 추고 있었다.


아직까지 하루에 사망자 수가 몇 백 명은 나오는데 벌써부터 바이러스 종식 파티 분위기라니.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 내일부터는 오전 시간대에 나와야 할 것 같다.


아직 상업 시설은 다 문이 닫혀 있다


어제 스페인 신문에서 이동 제한 완화 조치가 시작되었지만 집에 있기를 원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 이유가 감염에 대한 걱정도 있지만 다시 불구덩이 같은 현실로 돌아가는 것이 두렵고 , 집에서 보내는 단순한 생활이 꽤 즐겁더라는 것. 한 시민은 인터뷰에서 저녁이면 나가서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는데 집에 있어 보니 사실  진짜 원하는 건 소파에서 편하게 누워있는  시간이었다고 답했다.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다. 나만 해도 산책만 할 수 있어도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나가려고 하니 귀찮은 마음에 소파에서 엉덩이 떼는 데 한참 걸렸다. 격리 이전에는 쉬는 날 종종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작업하곤 했는데, 카페가 문을 열어도 한동안은 굳이 찾게 될 것 같지는 않다.  


밖에서 화장실 한번 가려면 노트북에 가방까지  다 챙겨들고 가야 하는데 집에서는 그럴 필요 없고, 소파에서 편하게 책을 읽을 완벽한 각도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 밥을 때도 이야기하다 비말 튀는 것, 침 섞이게 음식을 공유해 먹는 것도 신경 쓰이겠지.


학교는 이번 학기 완전히 온라인 수업으로 하기로 결정 났지만 이제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다. 일단 매일 조금씩 땅을 밟으며 걷는 것부터 시작해보려 한다.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해도, 다시 사람을 대면하는 일이 두려워지지는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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