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대초록 Jun 01. 2020

코로나 시대의 여행

일상을 최대한 여행과 가깝도록



오월을 이틀 남겨 둔 토요일, 


알람도 맞추지 않고  늘어지게 자고 일어났다. 요가도 안 하고 평소 루틴도 가뿐히 무시했다.(하지만 아침은 절대 스킵 하지 않지) 오늘 '일'과 관련된 어떠한 것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오전 내내 있는 힘껏 빈둥거렸다. 


스페인 이동 제한 완화 1단계에 들어서며 미술관과 박물관도 재개장을 했다. 그간 문화생활이 너무나 고팠던 터라 백만 년 만에 렌즈 끼고 화장까지 하고서(마스크 껴야 하니 눈만) 말라가 현대 미술관인 CAC로 나섰다. 


격리 기간 동안 깜박 잊고 있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집 밖에 나갔더니 스페인이네...?

이 날씨, 이 하늘, 이 나무, 이 꽃향기, 이 분위기..... 나 스페인 여행 왔니?

벌써 9개월 됐는데 뭐야, 뭐가 이렇게 설레. 



무료입장인 CAC 미술관은 그리 크지 않지만 상설 전시도 특별 전시도 알차다. 벌써 세 번째 방문인데 상설 전시는 볼 때마다 새롭다. 




어머, 보따리 아냐? 하고 무심히 지나친 작품 작가명을 이제야 확인해보니 역시나 한국 작가님의 작품이었다. 



김순자, Installation of Two Bottaris, 2005


유리 천장을 머리에 지고 걸어가는 여성들 퍼포먼스.



Waling Ceiling. Walking Celing. 작가명은 기억이 안 난다.



원래도 사람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코로나 여파인지 관람객이 한 명도 없어 전세 낸 것처럼 즐기고 나와 갈만한 테라스를 찾아 구시가지를 요리조리 누볐다. 걷다가 꽃집이 보여서 분홍색 카네이션도 샀다. 


걷다 보니 피카소 미술관이 있는 좁은 골목에 다다랐다. 바로 앞에 지나칠 때마다 만석이었던 유명한 찻집 La teteria가 텅텅 비어 있다. 오오, 오늘이 날인가. San augustin 성당 종탑을 바로 코앞에 바라보는 명당 당첨이다.  여름이니까 Tinto de Verano를 마셔야지 생각했는데 찻집으로 와 버렸네.



무슬림의 지배 기간이 길었던 안달루시아 지역에서는 teteria라고 하는 아랍 스타일 찻집을 쉽게 볼 수 있다. 관광지 가까운 곳에 가면 아랍식 물담배에 타일 조명까지 화려하게 장식해 놓거나, 종업원들이 아랍식 복장을 하고 서빙하기도 한다. 대부분 아랍식 과자들도 함께 판다.  이곳은 그런 아랍 느낌 뿜뿜 나는 곳은 아닌데 차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위치가 기가 막히게 좋다. 15분마다 울리는 교회 종소리와 살랑거리는 정원의 나무를 보면서 차를 마실 수 있다.


평소에 차에 맛을 좀 들여보려 해도 결국은 커피로 돌아오고 마는 나는 커피형 인간이다. 하루 커피 세 잔을 두 잔으로 겨우 줄인, 평생 커피를 마시기 위해 위장을 튼튼하게 관리하는 사람. (위염 때문에 커피 못 마시는 건 너무 괴롭다) 커피가 일상의 음료라면 차는 여행의 기억과 함께한다. 


홍차의 맛을 전혀 모르던 대학생 때 유럽여행 가서 호스텔 조식으로 식빵과 함께 마시던 티백 홍차, 터키에서 가게에 들어갈 때마다 얻어 마시던 각설탕 넣은 차이,  호주 오렌지 농장에서 영국 친구들이 타주던, 티백 두 개를 진하게 우려 만든 밀크티,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1월 1일, 불교 찻집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일기를 쓰며 마시던 우롱차,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이 되었다는 대만 지우펀의 찻집에서 마신 차의 맛은 여행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초콜릿, 히비스커스, 레몬그라스, 오렌지를 블렌딩한 루이보스 차를 마시는 순간 스페인 여행 도중  일기를 쓰며 차를 마시는 것만 같았다. 온몸에 퍼지는 여행의 감각에 손끝까지 찌릿해져 왔다. 




코로나가 종식되지 않은 시기, 누군가는 병상에 누워 있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와중에 나의 행복을 말하는 게 어쩐지 조심스러워, 지울까 몇 번을 고민하다 남겨본다. 


내일 다시 기분이 가라앉더라도 지금은 이대로 완전히 좋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인터뷰 이게 뭐라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