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대초록 Jul 28. 2020

스페인에서 식사 초대를 받았는데

선물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6월의 어느 날 동료 파트리의 부모님 집에 초대받았다. 그날은 산후안의 날이라고 일 년 중 해가 가장 긴 하지를 기념하는 날. 원래라면 전국적을 다양한 축제가 열리고는 하는데 올해는 코로나 바이러스 인해 모두 취소됐다. 매년 산후안의 날이면 가족들끼리 모여서 식사를 한단다.


저녁 여덟 시 반쯤 만나 아홉 시쯤 해변 근처의 부모님 댁에 도착했다. 분명 파트리와 파트리의 남자친구, 나 이렇게만 간다고 해서 소규모 모임을 상상했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맞은편에서 삼촌에 숙모, 남동생과 그의 부인, 할머니까지 나타났따.


잠시 혼란스러워 여기 내가 와도 되는 자리 맞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 아 맞다, 이 친구가 예전에 자기 남자친구의 엄마랑 가는 공연에도 나를 불렀던 걸 떠올리니 이 상황이 금세 수긍되었다.


부모님네 댁은 아파트인데도 꼭 단독주택처럼 멀리 바다가 보이는 근사한 테라스와 커다란 파티오가 있었다. 어렸을 때 파트리가 쓰던 방은 현재 어머니의 작업실로 쓰이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옷을 만드신다고 하더니 빈티지한 재봉틀과 다양한 디자인의 골무 컬렉션이 가득한 게 꼭 디자이너의 방 같았다.



집안 곳곳에 직접 그린 그림이 걸려 있고 화장실 소품 하나까지 섬세하고 우아한, 딱 스페인 중산층의 집이었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꾸안꾸 스타일로 자연스럽게 잘 차려입고 계셨는데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우리네 할머니들이 떠올랐다. 그들의 젊은 날과 우리 할머니들의 젊은 날의 양상이 어떻게 달랐을지 생각하니 좀 이분이 이상해졌다.



저 멀리 바다가 보인다
온갖 꽃이 가꾸어져 있던 아름다운 파티오



식사는 거의 밤 열 시가 되어야 시작되었다. 상차림은 당장 코스요리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나온 음식은 스페인 감자 오믈렛인 또르띠야와 안달루시아 지역의 차가운 토마토 수프 가스파초, 그리고 누군가 사 온 엠빠나다가 메인 메뉴로 꽤 단출했다.


여기서 난 두 번째로 당황을 하고 마는데,  내가 채식하는 걸 아는  파트리가 며칠 전부터 뭐까지 먹지 않느냐고 몇 번씩 확인을 하더니 정작 부모님은 비건이 뭔지도 모르시고,  계란까지 먹지 않는 내가 먹을 수 있는 건 가스파초뿐이었기 때문이다. 파뜨리가 후무스딥과 아보카도 샐러드를 만들어와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조금 민망한 상황이 연출될 뻔했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오기 전에 부모님한테 어떤 선물을 가져가야 하나 한참 고심했는데 정작 준비해야 했던 것 선물이 아니라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코스타리카와 한국의 대접 받는 초대 문화에 익숙해져 있어 좀 더 가볍고 부담 없는 이 나라의 초대 문화를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거다.


사실 식사 시간이 한참 늦어질 거라는 걸 알고 간단히 뭘 먹고 온 터라 저걸로도 충분히 배가 찼지만 부모님의 내가 먹을 게 없다는 사실을 계속 신경 쓰셨다. 나는 나대로  알아서 내 음식을 챙겨오지  못하고 신경 쓰기게 만든 게 죄송스럽고.  



식사 후 할머니께서 파티오에 피어 있는 재스민 봉오리를 한 움큼 따다 건네주셨다. 그러자 가족들이 어디서 이쑤시개처럼 뾰족한 가지가 동그랗게 나 있는 나뭇가지를 하나 주어오더니 비스나가를 만들어 보라고 한다.  비스타가(biznaga)에 대해서는 예전에 말라가 워킹 투어할 때 가이드한테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보통 저런 가지에 재스민 꽃봉오리를 꽃아 동그란 모양으로 만드는 걸 일컫는데 모양이 예쁜 건 둘째치고 향이 매우 강해서 여름밤에 모기를 쫓는 데 적격이라고. 길에서 종종 비스나가를 파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너무 금방 지니까 웬만하면 사지 말라는 말도.



내가 만든 건 엉성하지만 실제로는 빼곡히 꽂아 만든다. 다음날 바로 시들어 버림.



진짜 비스나가는 이런 느낌 <출처:https://www.diariodelviajero.com/espana/la-biznaga-un-simbolo-malagueno>


파트리가 한국에서 몇 개월 산 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이미 한국에 대해서 어느 정도 배경 지식이 있고 몇 가지 한국어 단어도 알고 있었는데, 다들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단어가 하필 '꽐라'여서 한참 웃었다. 시시콜콜하고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썰어서 빵또아같은 빵 사이에 끼워 먹는 걸 다 같이 나눠 먹고서는 열두 시 반쯤 식사가 끝났다.


파트리의 어머니께서는 남은 음식을 잘 싸서 손님들에게 골고루 분배해 주셨다. 가스파초가 맛있다고 몇 번이나 감탄한 낵게는 남은 가스파초를 몽땅 다 주셨다. 만드는 방법이 정말 쉬우니 다음에는 조금 일찍 와서 같이 만들어 보자고 하셨다.


외국인이라고 특별히 주목의 대상이 되지도 않고, 특별한 대접 받지도 않고, 가족의 일원인 듯, 무심해서 유심했던 그런 저녁 식사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요가원 문 열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