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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Aug 03. 2020

쇠퇴해가는 도시를 예술도시로 바꾼 빌바오 구겐하임




반복 설정해놓은 알람을 소리에 여섯 시 반에 깼다. 말라가에서는 아직 깜깜할 시간인데 벌써 동이 터 있다. 해가 남쪽보다 한 시간 정도 더 일찍 뜨기 때문이다. 까치발을 하고 삐걱거리는 바닥을 지나 화장실로 갔다. 호스트 가족들이 깨기 전에 샤워를 마치고 가져온 노트북을 열었다. 원래라면 노트북 같은 거 들고 여행할 일 없지만 이번에는 끝나지 않은 일이 있어 처음으로 챙겨 왔다. 그뿐인가.  아이패드에 전자책까지. 신발도 세 켤레나 챙겼다. 이상하게 짐이 많은 여행이다.


창문을 열어보니 춥고 흐리다. 이게 7월 스페인의 날씨라니 믿을 수 없다. 전날은 긴팔 옷에 이불 두 개를 덮고 잤는데 호스트 아주머니는 민소매가 짧은 바지만 입고 돌아다니신다. 하루만에 북쪽으로 날아왔더니 이렇게까지 날씨가 급변할 줄은 몰랐다. 일기예보 앱에 해쨍쨍 표시만 가득한 말라가의 날씨가 살작 그리워졌다.


.

오늘의 정해둔 일정은 단 하나, 구겐하임 미술관에 가는 것. 미술관 개장 시간까지 한 시간이 남아서 크게 돌며 산책했다. 걷다 보니 Parque de dona라는 근사한 공원이 나타났다. 공원 한가운데에는 작은 연못에는 오리들이 둥둥 떠다니며 놀고 있고 이른 아침인데도 산책 나온 가족들이 오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남쪽에서는 보기 힘든 잎이 둥근 커다란 나무와 벤치에서 책 읽는 사람들, 넓게 펼쳐진 초록 풍경이 마음에 쏙 들었다. 공원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Bellas Artes 미술관을 지나서 고급스러운 길을 따라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향했다.


온라인 예매를 하고 왔는데도 입장 줄은 꽤 길었다. 한 명씩 열을 재고 손 소독을 한 후 건물로 들어갔다. 위생 수칙 때문에 티켓에 포함된 오디오 가이드는 앱 다운로드로 대체되었다.


캐다나의 건축가 프랑크 게리가 디자인한 구겐하임 미술관은 쇠퇴해가는 중공업 도시였던 빌바오를 현재의 유럽의 대표적인 예술 도시로 변신시켰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내부의 예술품보다 건물 그 자체로 더 유명한데 청어 비늘처럼 건물 대부분을 감싸고 있는 티타늄 타일은 프랑크 게리가 물고기에서 영감을 얻은 거라고 한다. 산업 폐기물이 있던 창고 자리에 세워진 이 미술관이 있는 빌바오는 현재 전 세계 예술가들을 불러 모으는 감각적인 도시가 되었다. 죽어가는 도시를 살려낸 것도 모자라 유럽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어 내다니, 새삼 예술의 힘을 느꼈다.



어떻게 보면 우중충한데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거리는 건물은 생각보다 더 거대했고 웅장했다. 무엇보다 미술관을 따라 흐르는 강과 설치 미술, 작은 공원이 어우러진 주변 풍경이 정말로 아름다웠다.


수천 송이의 베고니아 꽃이 있는 <Puppy>, Jeff Koons


<Tulips>, Jeff Koons


<Mamman>,  Louise Bourgeois


미술관의 건물 자체도 매력적이었지만 전시 중인 설치 미술 작품들도 인상적이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고철을 몇 년 동안 그대로 두어 자연스럽게 짙은 오렌지빛이 돌게 바래게 한 후 실제로 들어가 볼 수 있는 길처럼 만들어 낸 'The matter of Time'.


<The matter of time>, Richard Serra

미술관에서 거의 세 시간을 보내고 나와 점심을 먹으러 갔다. Green Bistrot이라고 비건 핀초스를 파는 식당이었는데 비건 핀초스의 종류가 다양했다. 핀초스를 먹을까 하다가 쌀을 먹고 싶어 10.5유로에 현미밥으로 만든 포케볼과 와인 한 잔, 비건 당근케이크가 포함된 오늘의 메뉴를 시켰다. 모양은 굉장히 예쁘게 나왔는데 소스가 너무 느끼하고 양이 많아 반은 남겼다.


당근 케이크는 주문이 잘못 들어갔나 착각할 정도로 비주얼도 맛도 희한했다. 예전에 밥솥으로 만들었다 실패한 당근 케이크가 딱 저런 모양이었는데. 식감은 케이크보다는 떡 같았고, 위에 올린 망고 시럽의 맛이 너무 강해 당근의 맛은 하나도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묘하게 중독적인 맛이었다. 





강변을 따라 구시가지 쪽으로 하염없이 걸었다. 걷다 보면 엄청나게 큰 나무와 벤치가 있는 작은 수변 공원이 여러 차례 나왔다. 지치면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전날 못 간 tirauki라는 비건 핀초스 바에서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휴대폰 배터리가 4퍼센트 남았네? 그런데 보조배터리도 배터리가 나갔네? 이러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길 잃겠네...?


숙소 주소와 가는 길을 공책에 빠르게 옮겨 쓰고 일단 충전을 하러 숙소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았다. 그 와중에 Etam에서 수영복 세일하는 걸 보고 홀린 듯 들어가 난데없이 비키니를 하나 샀다. 언제든지 바다에 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스페인 여름에 수영복 하나로는 안 된다.


 숙소에 돌아가 충전기에 휴대폰을 꽂자마자 피로가 급격히 몰려왔다. 점심때 먹다 남은 포케를 싸 와서 그냥 이걸 먹고 치울까 했지만, 여기까지 온 김에 비건 핀초스 바는 가 봐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힘을 내 시내로 걸어 나갔다.


하필이면 바 위치가 전날 어두운 냄새 풀풀 풍기던 그 이상한 골목이야.... 바닥에 철퍼덕 앉아 마리화나 냄새를 풍기는 불콰한 시선들을 무시하며 최대한 빨리 바로 걸어갔는데 아 놔, 또 문 닫았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길을 빠져나왔다. 전날 지난 질 안 좋은 길을 피해 큰길로 돌아 숙소로 돌아갔다. 휴대폰을 보니 2만 보를 걸었다. 돌아오니 호스트 부부가 부엌에서 과자를 먹고 있었다. 과자를 한 주먹 얻어먹으며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날 산세바스티안에 간다고 하니 거기에서 가면 좋을 곳들을 추천해 주었다. 부부는 빌바오와 산 세바스티안 두 도시가 경쟁 구도라며 최근 미식 쪽에서는 빌바오가 이긴 추세지만 산 세바스티안에는 해변이 있어서 좋다는 말을 해 주었다. 자기들한테는 빌바오가 더 좋지만 나는 둘 중 어디가 좋은지 한번 보라며.


산세바스티안으로 가기 위해서 들른 빌바오는 구겐하임 미술관 하나로 올 가치는 충분했다. 왠지 빌바오는 가을이 멋있을 것 같아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낙엽이 떨어진 빌바오의 수변 공원을 걸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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