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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Feb 11. 2021

스페인으로 소포 보내지 마세요



참 어수선하고 희한했던  2020년 연말은 한국의 그립고 감사한 사람들에게 엽서를 쓰는 걸로 마무리했다. 한동안 항로가 막혀 있었던 터라 걱정이 됐지만 다행히 엽서를 부치는 데는 마무 문제도 없었다. 단 우체국에서는 언제 도착할지는 장담을 못하겠다는 말을 했다.


엽서는 정확히 두 달 반만에 한국에 도착했다. 그것도 보낸 편지의 1/4만 제대로 주인을 찾아갔고 나머지는 행방불명이다. 오래 걸리더라도 부디 도착만 하기를, 부디 공중에서 분해된 건 아니기를 바라고 있다.


내가 보낸 엽서들이 길을 헤매고 있는 와중에 스페인으로도 편지와 소포가 날아왔다.



첫 번째 엽서는 무려 서류 봉투에 담겨 EMS로 왔다. 우편배달부한테 직접 전달받고 사인을 한 다음에도 어리둥절했다. 대체 무슨 서류지?


커다란 봉투를 자르고 그 안의 또 다른 봉투를 뜯으니 엽서가 나왔다. 피식 웃음이 났다. 엽서를 부치러 갔다가 EMS만 스페인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서류 봉투에 꽁꽁 봉해 보낸 친구 마음의 온기가 여기까지 전해졌다. 그리고 서류봉투에 부착된 발송 스티커의 배송비를 보고서 헉 소리가 나왔다.


이만 육천 원.......?


엽서 한 장에 이만 육천 원이라니, 뒤늦게 미안함이 급습했다. 우체국에서는 EMS임에도 불구하고 일 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했단다. 얼마나 거슬러 올라가야 한국에서 스페인까지 우편물을 받는 데 일 년이 걸리는 시대까지 갈까.



그리고 며칠 뒤, 프랑스에서도 편지가 날아왔다. 예쁜 나무가 콕콕 박혀 있는 사랑스러운 크리스마스 카드. 여러 가지 신기한 인연으로 얽혀 있는 동료 선생님이 보내 준 편지였다. 이전만큼 연초 분위기가 안 나는 1월, 이 편지 한 장으로 신년임이 훅 와 닿았다.




여기까지는 그저 감동적이기만  이야기인데, 지금부터 이야기할 소포는 스페인 세관과 우체국의 합작으로 나를  번씩 뒷목 잡게 했다.


작년 초부터 내게 소포를 보내려고  친구는 코로나 때문에 항로가 막혀   좌절하고  번의 시도 끝에 발송에 성공했다. 어마어마한 EMS 택배비를 내고서.    , 스페인 세관에서 통지서가 날아왔다.  소포가 세관에 잡혀 있으니 받고 싶으면 첨부한 서류를 제출하라는 거다, 언급한 날짜까지 내지 않으면 소포는 한국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엄포와 함께.


서류에 물건 종류, 가격, 개수, 사이즈 등을 상세히 기재해야  받기도 전에 제로 내용물을 스포 당해가며 서류를 제출했고 며칠  세관에서 연락이 왔다. 관세 60유로가 나왔으니 이걸 내면 소포를 보내 주겠다는 거다.


60유로라니

이런 양아치들을 봤나.


사업 목적으로 온 물건도 아니고 금지 품목도 없는데 물건값과 맞먹는 세금을 때리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모니터를 향해 온갖 욕을 해대며 세금을 냈고 며칠 뒤 순조롭게 받았으면 그나마 아름다운 결말이 됐으련만





......... 이건 또 뭔 소리.


주소에 아무 문제없는 건 둘째치고  세금까지 냈는데 회송한다고?

놀란 가슴 진정시키며 우체국에 전화를 하니 소포는 정상적으로 배송 중이라며 기다려 보라 한다.


(부들부들)


그리고 며칠 내내 현지 우체국에서 소포 위치를 추적하며 무사히 받으려고 집에만 있었는데, 분명 내가 집에 있었던 날 부재중이라 전달이 안 됐으니 여기서 물건 찾아가라는  통지문만 우편함에 달랑 넣고 간 거 아닌가.


나 혈압 낮은데 이번 일로 정상 혈압 될 거 같아.



결국 트룰리를 끌고 우체국으로 갔다. 직원이 창고에서 물건 찾는 동안 여기서 또 문제 생긴 건 아닌지 조마조마했다. 그리고 드디어! 한국에서 출발한 지 한 달 반 만에 소포가 내 품으로 왔다.





상자 안에는


코로나 직전 친구가 스페인에 올 때 챙겨 왔던, 내가 먹고 극찬한 채황과 풀무원에서 새로 나온 정면까지 채식 라면 두 팩,

여기 아시아 마트에서는 못 구하는 연두 두 종류,

한국식 채수 파우더(여기서 채수 큐브는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베이스가 달라서 한식 국물 요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채수면 채수지, 채소 육수는 뭐지 ㅋㅋ)를 포함한 한국의 감칠맛과 펭수 잠옷과 다이어리, 올여름에 해변에서 유용하게 사용할 살롱과 한글 가득한 종이책, 역시 여기서는 못 사는 비말 차단 마스크(지금 생각하니 마스크 때문에 세관에 잡힌 듯하다), 손 편지가 빈 공간 하나 없이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그리고 사진에는 없지만 순면 팬티 세트까지. 친구가 스페인에 있을 때 여기서 순면 속옷을 어디에서 사야 할지 모르겠다고 내가 한 말을 기억한 모양이다. 소포에 속옷이라니, 꼭 우리 엄마 같아 한참을 웃었다.



오래 걸리더라도 물건은 물 건너올 수 있는데 사람은 못 오가는 현실이 야속하다.

이전보다 모든 것이 느리고 불편하고 이상한 이 시국에, 이전보다 더 부지런히 마음을 보내주는 사람들이 있어 든든하고 따뜻한 2월이다.   



+덧,

뒤늦게 알아보니 스페인으로 소포 받는 거 악명이 어마어마하더군요. 지갑과 정신 건강을 위해서 웬만하면 스페인으로 소포 받지 말라고 한입을 모으덥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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