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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Mar 14. 2021

도와달란 말을 못 해서



스페인에서 첫 이사를 했다


새집은 이전 집보다 수납공간도 많고 부엌도 널찍해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데 단 한 가지, 매트리스가 푹 꺼진 게 불편했다. 잠자리는 너무 중요하니까 이케아에 가서 매트리스를 하나 사기로 했다.


요가원에서 만나 친해진 친구 도이나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이케아에 같이 가 주겠다고 했다. 이케아는 말라가 시나에서 기차로 15분쯤 떨어진 곳에 있는데 도이나는 이미 여러 번 와 봐서 뭐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내게 쇼핑은 여러모로 스트레스다. 아주 가끔 쇼핑 신이 강림하면 스스로도 놀랄 만큼 빠른 시간에 좋은 물건을 건지기도 하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쇼핑 쪽으로 똑똑이 세포가 없어서 물건을 고르는 데 확신이 없고, 그러니 고르는 데 한참 걸리고, 에너지는 평소보다 급격히 방전되고, 쇼핑은 역시 힘들다 생각하고.... 이래서 가급적이면 쇼핑은 하고 싶지 않다.


도이나는 쇼핑을 좋아하는 데다 명확한 선택의 기준을 가지고 있어 매트리스 포함 내가 사야 할 것들을 좀처럼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명쾌하게 판단을 내려줬다. 덕분에 예상보다 빨리 쇼핑이 끝났다.


이케아 매트리스는 압축한 채 둘둘 말려 있어 운반이 용이하다. 한국에서 아빠 차로 매트리스를 운반했던 경험이 있어 막연히 택시를 타면 되겠지 싶었는데 막상 포장되어 나온 매트리스를 보니 생각 이상으로 크고 무거웠다. 일반 승용차에는 안 들어갈 것 같고 우버 밴은 가격이 너무 비쌌다.


그때 도이나가 묘안을 냈다. 일반 택시 7~9인승을 호출하면 우버 보다 가격이 쌀 지도 모른다며 콜택시 회사에 전화를 걸어 문의했다. 실제로 우버 밴 가격의 반 밖에 안 됐다. 도이나는 다음 일정이 있어 택시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가야 했는데 시간만 됐다면 같이 집까지 가서 매트리스 옮기는 걸 도와줬을 텐데라고 하며 괜히 미안해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오늘 너 없었으면 시간도 두 배 이상 걸렸을 거고 호출 택시 부를 생각도 못했을 거라며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도이나가 떠나고 잠시 후 어마어마하게 큰 9인승 밴이 도착했다. 택시 기사님이 24kg짜리 매트리스를 번쩍 들어 차에 실어 줬다. 이렇게 큰 차에 나와 매트리스만 있는 게 조금 민망했다. 택시는 집 앞까지 무사히 도착했고 예상 가격보다 더 저렴했다. 내릴 때는 기사님이 도와줬지만 건물 코앞에서 내려줬음에도 불구하고 가지고 집까지 올라가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매트리스를 질질 끌어 겨우겨우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들여놓기는 했는데, 저걸 어떻게 들어서 침대 프레임 위에 올릴 것이며, 원래 침대에 있던 매트리스는 또 어떻게 들어서 다른 방으로 옮겨놓는담??


포기하고 거실 창문 커튼이나 설치하자 싶어 의자 위에 올라갔더니 이번에는 손을 최대한으로 뻗어도 커튼봉이 잡히지 않아.... 하....


새 매트리스를 샀음에도 불구하고 현관 앞에 그대로 방치해 둔 채 푹 꺼진 침대에서 또 쪽잠을 잤다.


다음날. 어떡하지,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은데 누군가에게 매트리스를 좀 들어달라고 부탁을 해야 할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몇몇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한 명은 일에 박사 논문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시간 내어 이사까지 도와준 친구라 이런 일로 또 부르긴 미안하고, 한 명은 허리가 안 좋아 무거운 걸 못 들고, 한 명은 임신 중이라 당연히 안 되고, 한 명은 나이가 있는 데다 몸이 약해 이런 걸 부탁하기 미안하고, 도이나는 도와주겠지만 말라가 밖에 사는데 매트리스 들어달라고 여기까지 오라고 하기도 뭣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이런 걸 부탁할 만큼 친한 사이인가 싶고....


사실 물리적 여건 때문에 안 되는 게 아니라면, 누구든 부탁하면 도와줬을 것이다. 하지만이런 사소한 일로 누군가의 시간을 내게 내달라고 말하기 위해 입이 떼지지가않았다. 도저히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서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했겠지만, 매트리스를 같이 들어달라고 하는 일이 과연 누군가의 시간을 뺏을 만큼 중요한 일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문득, 한국에 있을 때 친한 친구가 혼자 이사를 했다는 말을 듣고 놀랐던 일이 생각났다. 워낙 사교적이고 주변에 사람이 많은 친구여서 내가 아니라도 부탁할 사람들이 한 트럭은 있을 것 같은데, 당시 발목도 안 좋으면서 자기 차로 실어와 혼자 이사했다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 있던 친구들 모두 왜 연락 안 했냐며 친구를 가볍게 타박했더랬다.


워낙 시간을 쪼개 사는 친구라, 다른 사람의 시간도 자기 시간처럼 생각했을 게 분명한 친구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엄마와 통하하며 엄마도 똑같지 않냐며, 부탁하는 일이 어렵지 않냐는 질문에 그녀의 대답은 명쾌했다.


"아니? 뭐가 어렵노. 딱 부탁하고 밥 한 끼 사면 되지."



핸드폰을 한참 만지작거리다가 혼자 해 보기로 했다. 원래 있던 매트리스에 두 번 정도 깔려가며 다른 방 침대 위에 겨우 올려놓고, 새 매트리스를 질질 끌고 비닐 째 프레임 위에 올려, 급격하게 펼쳐진 매트리스와 사투를 벌여 가며 결국에는 다 해냈다.

JTBC 독립만세에서 악뮤 이찬혁이 매트리스 까는 거 보고 완전 공감했다


아직도 모르겠다. 어쨌든 힘겹게라도 혼자 할 수는 있는 일을 혼자 하는 게 맞는 건지, 둘이 하면 더 편한 일이라면 미안함을 무릅쓰고라도 도움을 받는 게 맞는 건지. 한국이었다면 좀 달랐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 떠올랐다. 아.... 커튼도 끼워야 하는데. 그건 누구한테 부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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