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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May 01. 2021

스페인에서 외국인 친구들과 본 영화<82년생 김지영>



말라가 현대 미술관CAC에서는 종종 나라별 영화 상영회가 열리곤 한다. 4월은 한국이  당첨되어 한 달 동안 <완벽한 타인>, <배심원들>, <82년생 김지영> 그리고 <우리집> 이렇게 네 편의 영화를 상영했다.


그중  <82년생 김지영>과 <우리집>을 보고 왔다.


<82년생 김지영> 책은  <Kim Ji Young, nacida en 1982>라는 제목으로 스페인에서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 그 사실을 모르고 마드리드의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하고선 얼마나 반갑던지.


스페인에서 출간된 82년생 김지영



책으로도 읽었고 이미 영화도 보았는데 같이 간 스페인, 프랑스, 독일, 다국적 멤버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볼지 궁금했다. 과연 내가 느낀 것들을 이들도 똑같이 느낄까. 그들 나라 여성들 사정이 한국보다 낫다고는 해도 영화에서 지영이 겪는 일들이 거기에 없었던 것은 아니니. 프랑스에서는 여성이 남편 허가 없이는 은행 계좌도 못 열었던 때가 있지 않았나. 그게 불과 몇십 년 전의 일이다.


책과 영화까지 하면 벌써 세 번째 접하는 스토리지만 참 볼 때마다 화가 나고,  K-장녀의 희생 서사는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우리 엄마의 이야기이기도 하니 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중간중간 스페인어 번역도 어떻게 되어 있는지 봤는데 영 정교하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큰 문제는 호칭 처리였다.   



지영이 빙의된 것처럼 행동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지영이 시어머니를 '사부인', 남편을 '김서방'이라고 부르거나 자신의 엄마한테 '미숙아'라고 하는 등, 호칭의 변화를 보며 지영이 지금 누구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걸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번역에서는 친정 엄마도 시어머니도 똑같이 'Madre', 사부인은 'Señora, Kim', 정서방은 이름 그대로 'Dae Hyun'이런 식으로 번역이 되어 있어 지영이 그냥 반항을 하는 건지 뭔지 헷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가 끝나고 이야기해 보니  다들 그 부분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고 했다.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그리고 극 중에서 할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란 지영의 동생 지석이 늘 자신의 두 누나를 '김은영', '김지영'이렇게 이름으로 부르다가 지영이 아프다는 것을 알고 처음으로 '누나'라고 부르는 장면에서도, 번역에서는 똑같이  전이나 후나 이름으로 번역해 놓고서는 '니가 나를 'sister라고 부르는게 처음이네?'이러니 으잉 할 수밖에.





문화를 모른다면 작은 부분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것을 놓친 격이라 아쉬웠다.


여기에 한국과 같은 호칭 문화가 없으니 제대로 번역하는 건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  그만큼 더욱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저녁을 먹으며 다들 지영이 진짜 정신적인 문제가 있냐 아니냐를 놓고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지영은 멀쩡한데 남편의 관점에서 지영을 미친 것처럼 보는 걸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나는 지영의 억눌린 진짜 내면을 또 다른 '여성'의 입을 통해서 보여주는 장치라고 생각했고,  빙의가 됐는지 정신병인지 거기에 신경을 쓰고 보지는 않아서 왜 이걸 이렇게까지 걸고넘어지는지 궁금했는데,  그들의 논리는 지영이 심리상담사가 아닌 정신과를 찾지 않았냐는 거다.(그리고 어째서 심리 상담사를 먼저 만나지 않고 정신과로 직행했는지 또 토론....)



점점 머리가 아파지려는데, 프랑스 친구가 이래서 친구들 데리고 영화 보러 오면 안 된다고....  


 

아무튼 영화 자체에 대해서는 다들 굉장히 공감했고 책도 찾아서 읽어 보겠다고 했다. 이제 스무 살인 우리 학생도 보러 와길래 끝나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자기 엄마가 생각나서 울었다고 했다. 할머니가 손녀들보다 손자를 더 좋아했던 것에서도 공감했다며.


한국의 김지영은 스페인에서 소피아, 프랑스에서 엠마라는 이름으로,  세계에서 각자의 이름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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