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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May 24. 2021

왜 스타벅스도 남의 도시 게 더 좋아 보일까

그라나다에서


그라나다에 다녀왔다.


그라나다는 말라가에서 직행버스로 1시간 40분 떨어져 있는데 주가 달라 한동안 이동 제한 때문에 갈 수 없었다. 몇 주 전 스페인의 국가 경계령이 해제되고 이동 제한도 풀리며 드디어! 말라가 주 밖을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펜데믹 전 부모님이 스페인에 오셨을 때 함께 그라나다를 여행했다. 그때는 그라나다에 가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인 알함브라 궁전에 못 갔다.. 극성수기라 입장권이 모두 매진이었기 때문이다. 여행 몇 달 전부터 전전긍긍했음에도 결국은 표를 못 구해 입장권 없이 들어갈 수 있는 곳만 슬쩍 둘러보고 만족해야 했다.   


이 아쉬움은 알함브라와 그나마 비슷한 분위기라 하는 세비야의 알카사르에 가는 걸로 달랬다.(거기도 표를 못 구해서 입장 전 세 시간 전부터 줄을 서야 했음) 팬데믹 전에는 몇 달 전부터 난리를 쳐도 없던 표가 이번에는 하루 전날까지도 시간대별로 널널하게 있었다.



이번에 갈 곳은 알함브라 궁전과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 몇 곳, 그리고 학생이 추천해 준 비건 타파스 바가 전부다. 며칠 더 묵었다면 요가원도 하나 가 보았을 텐데.




알함브라를 제외한 이번 그라나다 여행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커피전문점인 Sur Coffee Corner에 가는 것이다. 말라가 단골 카페 Next Level Coffee 사장님들이 다녀온 후 인스타에 올려놓은 걸 보고 분위기에 반해 진작부터 구글맵에 별표 찍어 놓았다. 말라가에는 대체 왜 이런 곳이 없냐며!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숙소에 짐을 놓고 바로 카페로 향했다. 카페는 이름처럼 코너에 위치해 있었다. 잘 꾸며놓은 초록이들과 매달아 놓은 모카포트, 'Good Coffee Here'이라는 표지판까지 사진에서 본 것보다 훨씬  싱그러웠다. 어쩐지 이태원에 있을 법한 카페 같기도 하고.






내부에는 앉을 공간이 따로 없어  테이크아웃만 가능했다.  음식을 주문하면 나무 트레이 위에 담아 주는데  바로 옆의 작은 광장에 있는 벤치에 앉아 먹은 후 트레이를 돌려주며 계산하는 시스템인 듯했다. 커피도 커피지만 천연 발효종 빵으로 만드는 토스트도 무척 기대됐다.


오트유 라테 큰 사이즈와 직원들의 추천을 받아 아보카도와  루꼴라, 잣이 올라가는 토스트를 주문했다.   


내 차례가 된 것 같아 커피 내리는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는데 직원이  우유갑을 하나 뜯는다. 설마 하며 지켜보았다. 그 우유를 스팀 해서 그대로 에스프레소에 부었다. 내 커피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끝까지 보았는데 결국 내 것이 맞았다. 대체유를 주문하면 이런 일이 왕왕 일어나니 잘 지켜봐야 한다. 직원한테 오트유로 주문했다고 하니 미안해하면서 과일 조각을 서비스로 내어 주었다.


트레이를 들고 근처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앞뒤 양옆으로 카페 손님들이 벤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공원 전체를 매장으로 쓰다니. 이 카페, 영리한데?





빵은 쫄깃 바삭하고, 루꼴라 향 신선하고, 잣에 양념한 소스 맛은 풍부하고! 최근에 먹은 토스트 중 최고였다. 커피는 말할 것도 없다.


이 카페, 맛, 서비스, 분위기까지 그대로 들고 말라가로 가져가고 싶다...


트레이를  반납하러 가니 직원이 물었다.


"어땠어?"

"최고야!"


카페인 주유가 끝났으니 알함브라로 향했다. 빨간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돌아 알함브라로 들어갔다. 오월의 알함브라는 오렌지나무와 장미꽃이 콜라보 중이었다. 언제 와도 아름답겠지만, 이 계절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을 것 같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카디스에 다녀온 후 거의 오 개월 만의 여행이다. 통금에 이동 제한까지 뭐가 정신없이 생기고 바뀌는 걸 지켜보며, 됐다 마, 이럴 때 여행도 좀 쉬는 거지. 돌아다니는 것도 지겹다-  생각한 건 오산이었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햇빛과 낯선 도시의 분위기와 여행의 흥분을 원료로 만든 에너지가, 마른 땅 물 흡수하듯 쫘악짝 몸으로 흡수되어 퍼져나가는 것만 같다. 걸어도 걸어도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솟는 기분. '배터리 충전이 완료되었습니다'하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띵- 하며 울리는 이 기분!


 



모두가 여행을 좋아하는 것도 여행과 맞는 것도 아니니 여행을 무조건적으로 찬양하는 것은 경계하는 편이다.


여행이 늘 기운을 주는 것도 아니며 어떤 상태에서 어디를 누구와 함께 여행하느냐에 따라 에너지를 배로 고갈시키기도 하니까. 내 몸과 마음의 상태에 따라 집 밖으로 나가는 것, 집에서 뒹굴뒹굴하는 것, 사람 만나는 것, 사람을 안 만나는 것 등 그때그때 적절한 처방을 내려주는 게 중요하다. 이번에는 이 처방이 잘 들어맞았다.


알함브라에서 네 시간을 보내고서 천천히 걸어 시내로 내려왔다.



알함브라도 너무 예뻤지만 사람들 있는 풍경이 제일 좋다.


다음 날 아침,  Sur Coffee와 함께 찜해둔 또다른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에서 커피를 마시고 스타벅스로 갔다. 해야 하는 일을 다 못 끝내 여행지에 노트북을 가지고 와 버렸다. 스타벅스는 커피를 마시는 게 아니라 일을 하러 가는 곳이다. 스페인에서 오랜 시간 앉아 노트북을 할 만한 카페는 드물다. 말라가 시내에 단 두 곳 있는 스타벅스는 테이블도 좁고 공간도 협소한테 그라나다 스타벅스는 젋고 기다란 테이블에 조명도 딱 좋다. 거기기다 창밖으로 보이는 초록뷰까지 완벽하다.



남의 모자라 남의 도시 스타벅스까지 좋아 보이는  무슨 심보람.  Sur Coffee 스타벅스도 모두 말라가로 가져가고 싶다.


낯선 스타벅스에 앉아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며 일을 하는 걸로 그라나다 여행을 마무리했다. 노트북을 덮고 마음 편히 버스 터미널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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