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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May 26. 2021

카페 사장님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일어나면 제일 먼저 주전자에 물을 올린다. 물이 끓는 동안 그라인더를 꺼내 커피 원두를 간다. 왼손으로 몸통을 단단히 잡고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돌리면 만지지 않아도 단단한 커피콩의 감촉이 느껴진다.


마지막 커피콩이 갈릴 때쯤 물이 끓는다. 종이 필터 한 면을 접어 드리퍼 위에 올리고 방금 갈아낸 커피 가루를 붓는다. 그사이 한 김 식은 물을 주둥이가 가느다란 드립포트에 옮겨 담은 뒤 토스트기에 빵 두 쪽을 넣는다. 일정한 물줄기로 세 번 원을 그리며 2분 30초 안에 내린다, 이런 원칙은 가뿐히 무시한다. 시간도 원을 그리는 횟수도 그날의 기분대로다.


마지막 한 바퀴를 돌릴 때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토스트기에서 빵이 튀어 오른다. 커피를 갈고 내리며 여는 하루. 매일 반복되는 아침 풍경이다.     




언제부터인가 커피를 마시는 것보다 커피를 준비하는 시간이 더 좋아졌다.  모카포트나 캡슐커피 머신도 사용해 봤지만 핸드드립이 제일 좋은 이유는 손이 많이 가고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본론까지 가는 과정이 점점 짧아지는 편리한 세상에서 좋아하는 걸 준비하는 시간은 빨리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되도록 오래 끌고 싶다.      


원두가 떨어졌거나 반복되는 아침에 변주를 주고 싶은 날은 집 바로 옆에 있는 카페에 간다. 바 테이블에 앉아 스페인식 에스프레소인 카페 솔로 한 잔을 시켜 놓고 사람들을 구경한다. 바 안쪽에서 군더더기 없이 날렵한 동작으로 에스프레소를 내리는 바리스타를 보고 있으면 종종 서울에서 자주 가던 카페 사장님이 떠오른다.      



여느 아침처럼 일어나자마자 물을 올리고 보니 원두가 똑 떨어져 있던 날이었다. 10분 거리에 근사한 카페가 몇 개 있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세수는 하고 옷은 갈아입어야 할 텐데 그러기에는 귀찮았다. 그때 길 바로 건너편에서 작은 테이크아웃 카페를 본 기억이 났다. 모자를 눌러 쓰고 텀블러 하나를 챙겨 그 카페로 향했다.      

횡단보도 앞에서 불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하얀색 정사각형 카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까만색 글씨로 커다랗게 쓰여진 ‘LIFE’.  카페 이름 치고는 거창하다고 생각하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어, 안녕하세요.”     


에스프레소 머신을 닦고 있던 사장님이 인사를 건넸다. 까만색 티셔츠에 청바지, 단정한 차림이다. 처음 봤는데 왜 어? 라고 한 걸까 궁금해하다 텀블러를 내밀며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사장님이 커피를 내리는 동안 바 테이블 앞 스탠딩 의자에 앉아 카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방금 본 간판의 ‘LIFE’ 아래 작게 쓰인 ‘Above All, coffee’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 한 편에 놓인 가게 명함에는 간판의 ‘Life Above All, Coffee’를 한국어로 풀어놓은 문장이 쓰여 있었다.      


‘무엇보다 먼저인 삶’, 이게 카페의 이름이었다.    

 

명함을 만지작거리다 카페 안으로 눈을 돌리니 사장님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옷차림처럼 단정한 뒤통수다. 몸을 앞으로 살짝 15도 정도 숙이고 일하는 사장님의 뒷모습은 어쩐지 계속 보고 싶어지는 데가 있었다.


숙련된 바리스타들의 커피 내리는 모습이 가볍고 유려하다면 사장님은 그 반대랄까. 빠르지는 않지만, 커피양을 맞추고 태핑하고 컵을 꺼내어 에스프레소를 내리는 동작 하나하나가 꾹꾹 점을 찍어 누르듯 꼼꼼하고 정성스럽다. 이 장면에서 에스프레소 기계 자리에 이젤을 갖다 놓는다면 그가 그릴 그림은 세밀화나 점묘화가 될 게 분명하다.


‘집중하는 사람의 뒷모습은 저렇구나. 저렇게 내린 커피는 맛이 없을 수 없겠다.’ 수업에서 판서할 때 학생들에게 보일 내 뒷모습은 어떨지 궁금해하며 생각했다.      



“텀블러 크기에 맞춰서 투 샷 넣었어요.”    

 

커다란 사이즈에 꼭 맞춰 커피가 담긴 텀블러가 묵직했다. 거기다 텀블러를 가지고 왔다고 2,500원짜리 커피를 500원이나 깎아주시기까지. 통 바깥까지 커피의 온기가 전해졌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제일 좋아하는 컵에다 커피를 따랐다. 두 잔은 넉넉히 나올 양이다. 한 입 마셔보니 역시나, 작은 카페에서 2,000원 주고 팔기에는 어쩐지 아까운 맛이다.      


그날 이후 원두뿐만 아니라 의욕이 떨어지거나 기운이 필요할 때 텀블러를 들고 ‘무엇보다 먼저인 삶’을 찾았다. 갈 때마다 사장님은 무심한 톤, 다정한 표정으로 “어,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했다. 코어에 힘을 꽉 주고 삶을 살아 내듯 커피를 내리는 사장님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카페인 못지않은 각성이 생겼다. 당장 돌아가 저것과 똑같은 자세를 하고서 일하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 동네를 떠나 사장님 커피를 못 마신 지 2년이 다 되어간다. 대흥동의 무엇보다 먼저인 삶 커피는 아직도 있을까. 사장님은 여전히 손님들한테 ‘어,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할까. 그때처럼 까만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으실까. 그의 뒷모습이 보고 싶어지는 날이면 몸을 15도쯤 숙이고 모든 동작에 숨을 불어넣듯 커피를 내려 본다. 이렇게 내린 커피는 맛이 없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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