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보러 가는 중 가방 안에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화면에 뜬 산이의 이름을 보고 멈춰 섰다. 연락 안 한 지 오 년은 된 것 같은데. 얘 뭐 잘못 눌렀나? 아무 소리도 안 나거나 어어 하는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응답 버튼을 눌렀다.
"야! 너 스페인이야?"
나한테 전화한 건 맞나 보다. 산이와는 스물세 살 첫 배낭여행 중 터키 카파도키아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났다. 한국인 와이프와 터키인 남편이 운영하던 그곳은 당시 한인 민박이 거의 없던 터키에서 한식을 먹을 수 있어 장기 여행자들의 블랙홀로 유명한 곳이었다. 도리토리 방 내 옆 침대를 쓰던 산이는 입대 직전 한 달간 터키를 여행하던 중이었고 동행과 막 헤어져 혼자가 된 참이었다. 놀 거 다 놀고 할 거 다 하게 생겼는데 의외로 반듯하고 순수하고 허당끼가 있는 애였다.
아침부터 거하게 한식을 먹은 후 낮에는 긴 산책을 하고 저녁에는 숙소에 모여 카드 게임을 하는 게 우리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산이뿐 아니라 앞 침대 윗침대 쓰던 언니 오빠들과도 금세 친해졌다. 여행 일정이 제각각이었지만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모두 일정을 바꿔 며칠간 터키 동쪽 끝까지 여행하기도 했다. 여행 계획을‘수행’해내느라 좀처럼 즉흥이 없던 내게는 그때부터가 진짜 여행의 시작인 셈이었다. 함께한 10일 후 몇몇은 길 위에 남았고 몇몇은 한국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산이는 부지런히 편지를 쓰고 전화를 하는 훈련병이 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몇 년간은 산이의 면회도 가고 언니 오빠들 결혼식에 참석하느라 일 년에 한두 번은 만났다. 다들 터키에서보다는 좀 경직돼 보였다. 졸업과 취업, 이직 등 살길 찾아 얼굴 근육 긴장 풀릴 일 없는 날들을 보내며 서서히 연락이 뜸해졌다. 그나마 오래 연락의 끈을 붙들고 있던 산이와도 코스타리카에 일하러 간 직후 주고받은 메시지가 마지막이었다.
산이는 우연히 내가 스페인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연락하는 거라 했다. 거기 간 지 얼마나 됐냐는 질문에 일 년 반쯤 됐다고 하니 대뜸 이렇게 물었다.
"한국이 싫어?"
‘연락할 때마다 한국에 없다’가 ‘한국을 싫어한다’로 이어지는 단순한 결론이 여전해 피식 웃음이 났다. 꼬인 거 없이 해사한 말투가 정말로 궁금한 게 분명했다. 산이의 질문을 넘겨받아 나한테 물어보았다.‘너 한국 싫어? 아닌데. 서울만큼 힙한 도시가 없다고 생각해. 한국의 편리함과 쾌적함을 사랑하고 성질이 급해 좋은 쪽으로도 빨리 달려나가는 한국인들의 저돌성을 존경해. 외국 생활의 로망, 딱히 그런 게 있는 것도 아니야. 진로를 선택할 때 한국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걸 염두에 두었으니 그걸 최대한 활용하는 거고. 어떤 토양과 공기와 사람들이 내게 맞고 어디에서 일할 때 내 기량을 잘 발휘할 수 있는지 탐색해보는…‘그럼 좋아해?’…… 꼬여버린 단어를 풀다 말고 대답했다.
"몰라.”
잠시 후 산이는 좀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다음 달에 결혼한다고. 휴대폰에 뜬 이름을 보자마자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만 밉지는 않았다. 수능 오수를 해서 늦게 대학을 졸업한 그 애는 오래 기간제 교사를 했다. 최근 임용이 되어 7년 사귄 여자 친구와 결혼하는 거랬다.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카톡 프로필에 있는 산의 얼굴이 조금은 낯설었다. 누가 봐도 선생님 같은 인상이다. 학생들 단체 사진을 프로필에 올려놓은 걸 보니 학생들에게 마음을 많이 주고 그만큼 사랑받는 선생님일 것이다.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또 연락은 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서로의 얼굴 근육이 가장 말랑말랑하던 시간을 함께한 친구가 행복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