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내 어른을 미워하며 자랐다.
아빠는 자주 화를 내고, 돈에 대한 궁리만 하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별 말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늘 아빠를 세차게 미워하는 듯하면서도 아빠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며 살았다. 어렴풋하지만 내가 어렸을 적 아빠가 외도를 했을 때 집안 풍경이 어땠는지, 엄마가 집을 나갔을 때 집안 공기가 어땠는지를 나는 환영처럼 기억한다. 아이에게 그런 가정환경은 자막 없는 외국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상황을 설명해 주는 사람은 없지만 누가 울고 있고, 누가 울음을 참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나이기에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눈치챌 수밖에 없다.
그런 부모에게 나는 그저 가정이라는 구색을 갖추기 위한 가구 같은 존재가 아닐까 자주 생각했다. 사업이 부도났다는 이유로 자식 둘을 각각 다른 친척집에 내맡겼다. 온 가족이 함께 살지 못하는 이유가 부도난 사업 때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게 그렇게 쉽게 포기할만한 일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먼 곳에서 내게 자주 전화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었고, 내 생일을 자꾸 잊어버리는 엄마를 조금씩 믿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장녀라는 이유로 친척 어른들은 내게 각자 자기 가족에 속해 있는 부모님 걱정을 늘어놓았다. 친가 친척들은 엄마를 흉보고 아빠 편드는 이야길 하고, 외가 친척들은 아빠를 흉보고 엄마 편드는 이야길 했다. 가장 힘든 건 난데 왜 내편을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는지 몰라 그 말들 속에서 나는 많이 외로웠다. 왜 내 아픔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지 의아했다. 그런데도 나는 말하지 못했고, 울지 못했다. 눈치가 빠삭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내가 말해봤자, 내가 울어봤자 아무도 내 이야기는 들어주지 않는다는 걸 예민한 육감으로 알았다. 그때는 편들어 주는 사람 많은 엄마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다.
나와 소통하지 않는 어른들을 혼자 속으로 이해해 보려 무던히도 애썼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자 결국에는 미움을 꺼내 들었다.
어른을 이해해 보려고 까치발을 들고 한 뼘쯤 일어서면, 어른은 저만치 멀어졌다. 나는 한 번 더 이해해 보려고 다시 발끝을 세웠다. 그러면 어른은 또 저만치 멀어졌다. 내가 얼마나 더 이해해야 어른의 마음이 내 손 끝에 닿을지 아득했다.
그렇게 발끝만 세우다 금세 어른이 됐다.
결혼 후 세 달 만에 임신을 했다. 아이를 갖겠다고 마음먹으니 마음먹은 만큼 수월하게 됐다. 그러나 결혼을 했다고 해서 내 운명의 색채가 한 번에 바뀌는 게 아니었다. 내 인생이 쉽게 흘러갈 리 만무했다.
첫 임신은 임신 중간에 태아와 이별하며 끝이 났다.
검사 끝에 태아의 염색체 이상을 확진받고, 차분한 의사의 빠른 권유로 임신중지를 하게 됐다.
아픈 이별을 한 날은 내 생일이었다. 밤새 장맛비가 세차게 내렸었는데 입원실에서 눈을 뜨고 보니 창문으로 햇빛이 들이치고 있었다. 창백한 내 얼굴에도 햇살 한 줌이 내려앉았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햇살인데도 왠지 피부가 따갑고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문득 앞으로 나는 제대로 살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온몸에 문신처럼 박혔다. 가슴 한 구석이 허했다. 가슴에 아무리 손을 갖다 대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서늘하게 식은 심장이 오래된 피아노 건반처럼 느리게 박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쁜 어른은 어떻게 태어나는지 아는가.
나쁜 어른은 실타래처럼 긴 어둠 속에서 태어난다.
그는 홀로 어둠 속에서 몸을 휘감는 어둠과 싸운다. 오랜 시간 싸우다 지쳐 그 무엇도 지켜내지 못하고 끝내 항복처럼 나 하나라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 때 그제야 어둠은 그를 놓아준다. 이기심으로 가득 찬 몸뚱이가 패잔병처럼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다. 그때 그는 깨닫는다. 자신이 나쁜 어른이 되었음을.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던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어른이 되었음을.
첫 임신이 아픔으로 끝났을 때 나는 내가 얼마나 나밖에 모르는 사람인가를 처절하게 깨달았다. 나는 누구도 미워할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무엇에도 슬퍼할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내가 아는 나쁜 어른들이 한순간에 다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1년 후 환영처럼 다시 임신테스트기에 두 줄을 보았다.
남편과 나는 많이 놀랐다. 서로의 손을 잡고 조용히 떨었다.
마침 또 내 생일날 병원에 가서 임신을 확인받았다. 인생 최고의 생일 선물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임신 기간이 수월하지 않았다.
이전과 같은 병원, 같은 진료실에서 같은 의사에게 같은 검사의 같은 결과를 받았다. 기형아검사에서 고위험군이 나왔다. 의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눈에서 폭포수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의사가 설명을 계속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같은 환자에게 같은 결과를 두 번이나 전하는 의사의 표정과 말투만 괜히 신경이 쓰였다. 저 힘든 말을 또 해야 하는 의사도 참 힘드시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에게도 나에게도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였다.
그날 나는 혼자 병원을 갔었다. 남편은 퇴근 후 나를 데리러 병원으로 오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펑펑 울며 병실을 나왔다. 우는 얼굴로 엘리베이터를 탈 수 없어 비상구 문을 열고 계단으로 갔다. 다리에 힘이 풀려 더 이상 걸음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계단에 그대로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눈앞에 창문이 있다면 그대로 뛰어들고 싶을 만큼 참혹한 심정이었다.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남편의 전화를 받고 나서야 나는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해당 병원에서 다급히 양수검사를 했지만 양수 양이 적어 결과를 보지 못했다. 양수검사를 전문으로 하는 병원을 찾아 서울까지 갔다. 그 병원 의사는 나의 첫 임신 히스토리를 듣더니 이번에도 결과가 좋지 않을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제대로 양수검사를 하기 위해서는 양수 양을 더 늘려야 했다. 물을 많이 마시며 다음 검사일을 기다렸다. 얼마 뒤 다시 양수검사를 했다. 그날은 남편이 휴가를 쓰지 못해 나는 제법 나온 배를 끌어안고 혼자 서울 병원까지 다녀왔다. 돌아오는 길에 소낙비가 쏟아졌다. 집에 다 와가는데 빗발은 자꾸만 더 거세졌다. 우산으로 아무리 가리려고 해도 옷자락이 한 움쿰씩 젖었다. 이번만큼은 이런 빗속에서도 꼭 아이를 지켜내는 엄마가 되고 싶어서 옷 따위가 젖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이었다. 그날 밤 나는 울지 않고 아주 오랫동안 배를 쓰다듬으며 잠들었다.
1차 간이결과가 좋지 않았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염색체 이상이 의심된다고 했다. 그러나 2차 정밀 검사 결과까지 기다려보자고 했다. 기다리는 마음이 자꾸만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떨어지는 마음을 주워 올리려 하루하루 애쓰며 시간을 보냈다.
최종 결과가 나오는 날 예약한 시간에 맞춰 병원에 도착했다. 그러나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빈손으로 병원을 나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과 나는 괜스레 하늘만 쳐다보며 관심도 없는 날씨 얘기를 했다. 무거워지는 공기를 어찌할 바 몰랐지만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서로 침착하려 애쓰고 있었다. 막 동네에 도착했을 즈음 휴대폰이 울렸다. 병원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의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상 없어요!" 그렇게 내내 모든 검사들이 문제 있을 확률이 높다고만 말하더니 기적처럼 최종 정밀 검사에서 염색체적으로 아무 이상이 없음을 완전히 확인받았다.
최종결과를 받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 그동안 나는 제대로 좌절하지도 슬퍼하지도 못했다. 뱃속의 태아가 느낄까 봐 터질 듯한 마음을 이를 깨물듯이 참았다. 그랜마 모지스의 전원 풍경이 담긴 그림 색칠하기 세트를 주문해서 내내 그림만 보고 붓만 만졌다. 남편 외에는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고,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캔버스 속의 손톱보다도 작은 칸만 들여다보고, 색을 채워 넣으며 두려움을 가라앉혔다. 무얼 해달라는 기도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럴만한 주제도 못된다고 여겼다. 그렇게 1년 같던, 지옥 같던, 심판 같던, 감옥 같던 한 달이 마침내 지나갔다.
태아 염색체에 대한 확인은 단순히 태아에 대한 확인이 아니었다. 나에 대한, 내 삶에 대한 확인 판결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엄마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신이 고심하여 판결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신은 내게 최종적으로 엄마가 될 기회를 선사해 주셨다.
매년 돌아오는 내 생일에 나는 여전히 케이크를 사고 초를 켠다. 그건 시부모님을 포함한 온 가족이 함께 보내기 때문이기도 하고, 케이크에 촛불 끄는 걸 좋아하는 아이 때문이기도 하다. 나를 향해 활짝 웃으며 손뼉 치고 노래 부르는 사람들을 나는 멀리 있는 그림처럼 바라본다. 그리고 홀로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며 생각한다. 내가 잃은 것과 얻은 것 사이에서 내가 어떻게 엄마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숨을 내쉬며 다짐한다. 나쁜 어른은 되었을 망정 나쁜 엄마는 되지 말자고 말이다.
종종 나는 아이의 두 발을 손에 꼭 쥐고선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맡는다. 아기 때는 그저 보드랍기만 한 냄새가 나더니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는 아이가 된 요즘은 제법 콤콤한 냄새가 난다. 눅진 그 냄새를 나는 여전히 좋아한다. 아이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는 냄새다. 내가 크게 호들갑 떨며 "음~ 울 애기 발냄새~!" 하고 말하면 아이는 묘하게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웃는다. 가끔은 아이가 내게 먼저 발을 갖다 대며 냄새를 맡으라고 요구 아닌 강요를 하기도 한다. 이런 이상하고 콤콤한 행복을 만나기 위해 내가 그토록 오랜 시간 울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