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대학생이 되어 내가 마주한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더 화사했다.
캠퍼스의 교정은 사계절 푸르게 정돈되어 있었고, 그곳을 거니는 여대생들은 다 한 아름의 꽃다발처럼 예뻤다. 샘이 날듯 부러운 것 천지였다.
나는 꽃 한 송이도 가져보지 못한 빈 화분 같았다. 부러운 마음을 떨치려고 마음을 털어내면 바싹 마른 푸석한 흙이 후드득 떨어졌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점점 사는 게 주눅이 들고 창피했다. 나도 남들처럼 꽃 한 송이라도 제대로 가져보고 싶었다. 오아시스 없는 사막 같던 세상에서 나는 물을 갈구하듯 사랑을 찾아다녔다.
꼭 한 번 진탕 사랑하며 살고 싶은데, 세상에는 내가 사랑할만한 게 별로 없었다.
부모는 늘 자기 인생 돌보기에만 급급한 분들이어서 애초부터 나와 정을 나눌 틈이 없었다. 친구와는 주고받는 우정을 나눌 뿐 사랑을 쏟을만한 관계는 될 수 없었다.
애인들은 모두 하나같이 비겁한 녀석들이어서 내 사랑을 다 받아먹고 난 뒤에는 입을 싹 닫고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과의 연애는 마치 물이 없어 바닷물을 마셔대는 것처럼 다급하고, 해롭고, 자기기만적이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여자가 더 사랑에 갈증을 느끼게 만드는 남자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사랑에 오래 굶주린 눈빛으로 만난 남자들이니 결코 좋은 사람일리 만무했다.
연예인에게는 흥미를 잃은 지 오래였고, 글쓰기는 미로처럼 어렵기만 했으며 여행에 빠지기에는 너무 철이 들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나' 자신이었다. 하지만 내게 있어 '나'는 내 사랑을 독차지할 만큼 그다지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니었다.
이십 대 후반의 나이를 잘근잘근 밟고 서 있던 어느 날이었다.
어디에도 풀어내지 못하고 내 안에 소복소복 모아둔 사랑들이 넘쳐흐를 때 즈음 내게도 아이가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잘 여문 새싹이 씨앗 껍질을 밀치고 고개를 쳐들듯 느닷없이 튀어 오른 생각이었다. 이럴 때는 꼭 내가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생각이 나를 선택하는 것 같았다.
옆에서 같이 걷던 친구는 자신이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지 조금은 겁난다고, 그래서 아이를 낳는 일에 확신이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친구 몰래 속으로 놀랐다. 지금껏 나는 왜 저런 생각을 못했을까 싶었다. 그럼에도 뚫어질 듯한 이 또렷한 확신은 대체 무엇인지 스스로도 어리둥절했다.
그 후로도 나는 계속 내 아이를 낳아 듬뿍 사랑하고 싶은 꿈을 꿨다. 내 사랑을 마음껏 쏟을 수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존재에 대해서 말이다. 깊은 사랑을 주고 설사 배반당하더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관계는 내 아이 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결혼도 임신도 모두 내가 선택하고 앞장섰다.
적당히 결혼할 때가 된 것 같아서 이제는 남편이 된 그에게 "그래서, 언제 결혼할 거야?"라고 한 게 어쩌다 프러포즈가 되었다. 마땅히 임신할 때가 된 것 같아서 "우리 이제 아이 가질까?"라고 한 게 우리 세 가족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남편에게 종종 "너는 나 아니었으면 결혼도 못했어!!"하고 장난스럽게 큰소리를 친다. 남편은 "네가 일찍 말을 꺼냈을 뿐이야. 나는 좀 더 있다가 말하려고 했어~. 다 계획이 있었다구." 하며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아마 우리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도 계속 이런 유치한 기싸움을 하지 싶다.
어찌 됐든 좋았다. 내 생의 두 번째 가족은 순전히 내 의지대로 선택하는 듯해서 맑고 단단한 기분이었다. 매번 순순히 내 결정을 따라준 남편도 조금씩 더 사랑스러워졌다.
임신을 앞두고 나는 생전 처음 엑셀 파일을 열어 재정계획을 세웠다. 다니던 콜센터를 결혼과 동시에 그만두었고, 출산 후 3년간은 일하지 않고 아이를 가정보육할 생각이었다.
아주 치밀한 계획이 필요했다.
육아선배에게 물어가며 아이를 낳고 나면 한 달 지출이 어느 정도일지 계산하고 추측했다. 남편과 내 보험 내역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불필요한 것은 없는지 살폈다. 고정지출을 검토하고, 매년 남편의 월급이 못해도 오만 원은 오르겠지 예상하며 그에 따라 수입 내역을 정리했다.
나는 평생 가계부 한 권 다 써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미련하게 아낄 줄은 알았지만 꼼꼼하게 계획하여 재정을 관리하지는 못했다. 그런 내가 남편에게 엑셀을 물어가며 표를 만들고, 앞으로 3년간의 지출과 수입 내역을 예상하고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엑셀표에 보기 좋게 색도 넣어 상사에게 보고하듯 남편에게 보였다. 남편이 내 설명을 들으며 "응응, 그렇지 그렇지." 할 때마다 왠지 모르게 희열이 느껴지고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래도 상황이 안 좋아지면, 그땐 내가 편의점 야간 알바라도 할 거야!"
사실 이 모든 것은 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행동이었다. 내가 나를 설득하고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렇게라도 해야 마음 편히 임신하고 출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혼 전에는 외벌이로 임신과 출산을 하는 것이 이렇게나 많은 두려움이 따르는 일인 줄 몰랐다. 고정 수입이 없어진 내가 남편 하나만 믿고 생명을 출산하는 일이 이렇게나 불안한 일인 줄 몰랐다.
남편은 성격상 불안과는 담을 쌓은 사람이라 계획 같은 건 조금도 필요치 않았다. 그래도 남편은 늘 같이 상의하고, 동부서주 하는 나를 지긋이 지켜봐 주었다. 섣불리 내 행동에 참견하며 아는 체하거나 이래라저래라 명령하지 않았다. 그의 묵묵함 속에서 나는 스스로 길을 찾고 나아가는 기쁨을 누렸다.
여러모로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내가 매사 감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계획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여겼다. 그런 내가 어떻게 그리도 이성적이고 현실적으로 출산 계획을 세울 수 있었는지 놀랍다. 내 안에 꽁꽁 숨겨져 있던 능력이 마침내 때를 맞아 활짝 펼쳐진 듯했다. 생명에 대한 책임감과 모성애가 내 안에 이런 모습으로 숨어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나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지 고민한 적은 없다. 하지만 아이에게 줄 내 사랑의 양과 질에 대한 자신은 있었다. 따지고 보면 아이 입장에서의 생각은 아니다. 단순히 내가 내뱉고 싶은 이기적인 사랑이었을 수도 있다. 좀 더 간절하게 말하자면 그때는 꼭 한 번 제대로 된 사랑을 해야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 그다음 생이 보일 것 같았다.
순수한 사랑을 말하기엔 나이 들어 버린 지금이지만, 나는 아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은 사랑을 빼놓고서는 말할 수 없다.
어쩌면 그건 삶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 아닐까.
나는 한 번도 마음에 꽃다발 한 아름 품어보지 못한 삶을 살았지만 아이만은 달랐으면 싶다.
아이 마음에 매일 꽃을 심듯 사랑 듬뿍 주고 키우고 싶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 세상에 나아갈 즈음에는 그 마음에 어여쁜 꽃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남이 가진 꽃다발 따위 부러워하지도 말고, 온갖 것에 사랑을 구걸하지도 말고 자기 삶을 오롯이 살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늘 누군가를 진실되게 사랑하고 싶었다. 종종 내 안에 아주 따뜻하고 순수한 사랑의 빛이 가득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비록 가진 거라고는 물기 한 점 없는 마른 흙이 전부인 사람이지만 살면서 꼭 한 번은 꽃 한 송이 피워내는 노력을 해보고 싶었다. 아이를 향한 내 사랑의 결심은 그렇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