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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못하는 책을 사는 여자

엄마의 (사치스럽고 건전한) 취미생활

by 열대나무



언제부턴가 나는 한 달에 한 번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사는 행위로 마음의 텅 빈 장식장을 채운다.


이 습관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이가 돌이 지날 무렵이었던가, 두 돌이 지날 무렵이었던가. 처음에는 아이 그림책을 사면서 시작됐다. 그림책만 사다가 내 책도 슬쩍 한 권씩 끼워 샀고, 나중에는 그림책 한 권 내 책 한 권을 사다가 이제는 내 책만 산다. 그림책을 한 권 같이 살까 고민하지만 잠시뿐이다. 점점 한 달에 한 번 책을 사는 이 행위가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기를 바라고 있다.


35개월 아이와 온종일 함께 있는 나로서는 사실 책 읽을 시간이 거의 없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가정보육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 내 시간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셈이다. 평일은 평일이라서 시간이 없고, 휴일은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자고 싶고 드라마 보고 싶지 책 읽고 싶을 만한 여유까지는 잘 생기지 않는다.


이런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향한 열망만큼은 한겨울의 구들장처럼 절절 끓는다. 엄마가 되기 전에 내가 얼마나 책을 사랑하고, 아끼고, 의지했는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뭉클하다. 기분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서점에 갔었다. 청소를 끝낸 깨끗하고 조용한 집에서 혼자 책 읽는 시간을 무척 애정했다. 그 시절의 기분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기 위해서 나는 읽지 못하는 책이라도 살 수밖에 없었다.


책장에는 다 읽지 못한 책이 여러 권이다. 오래도록 들춰보지 않은 책은 가끔 중고로 팔기도 했다. 책장이 가득 차는 건 싫기 때문이다. 채워 넣을 빈 공간이 없는 책장은 갑갑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 심장 같고 혈액 같은 책 몇 권만 꽂혀있는 그런 듬성듬성 비워진 책장이 좋다. 그 빈 공간을 볼 때마다 언제 또 내 분신 같은 책을 만나 꽂아놓게 될까 상상하며 작은 설렘을 느끼곤 한다.


매일 밤 나는 10시에서 11시 사이에는 잠자리에 들려고 한다. 내일의 육아를 위해서다. 하지만 자려고 누우면 온몸이 녹아들듯 피곤한데 쉽게 잠들지 못한다. 조금 전 아이를 재우느라 한차례 졸았기 때문이다. 8시에서 9시쯤 아이를 재우다가 깜빡 잠이 들면 나는 누가 깨우지 않았는데도 놀란 듯 벌떡 일어난다. 황망한 기분으로 샤워를 하고, 드라마를 좀 보고, 잡다한 주방일을 한다. 그리고 더 놀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자러 간다.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이 곁에 누우면 기묘한 컨디션을 느낀다. 몸은 피곤한데 정신은 반쯤 깨어있는 것 같다. 눈을 감은 채로 지금 자는 게 맞는지, 이제라도 일어나서 좀 더 내 시간을 보내는 게 맞는지 한참을 고민한다.


깊어가는 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시간이 훌쩍 가버린다 싶을 때는 알라딘 어플을 켠다. 이런저런 책을 검색하다 사고 싶은 책을 정하면 첫 페이지로 돌아가서 적립금 배너를 누른다. 그리고 제일 윗 목록에 있는 '퀴즈 참여하기'를 클릭한다. '퀴즈에 참여하시면 적립금 1천 원을 드려요'라고 크게 적혀있다. 오지선다의 답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해도 다 정답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나는 질문을 꼼꼼히 읽는다. 힌트보기도 눌러본다. 긴 페이지의 화면을 술술 넘겨가며 읽은 후 다시 퀴즈 푸는 화면으로 넘어온다. 그리고 1~5번 문항 중 가장 익숙한 제목의 책을 골라 체크하고 투표하기를 누른다. '정답!'이라는 팝업이 뜨면 늘 조금 짜릿한 느낌이다.


나는 알라딘의 적립금 주는 방식이 좋다. 천 원 할인도 허투루 주지 않는 정성이 느껴진달까. 고객으로 하여금 일말의 적극성을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내가 문제를 맞혀서 할인을 받아냈어!'와 같은 작은 성취감을 느끼게 한다. 카카오플친을 추가하고 쿠폰번호를 입력하라는 여타 브랜드의 성가신 방식보다 훨씬 품위 있고 세련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문득 알라딘의 적립금 퀴즈처럼 내 인생도 선택하는 모든 것이 정답이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아이를 키우는 일에도, 며느리가 되는 일에도, 아내가 되는 일에도 내가 하고픈 대로 하는 모든 것이 정답이면 생이 얼마나 보드라울까. 그러면 나는 매일 밤 보드라운 생의 이불을 덮고서 좀 더 쉽게 잠들 있을텐데 말이다.


고민 끝에 빨간색 표지를 가진 책 두 권을 샀다. 알바 데 세스페데스 작가의 <금지된 일기장>과 고선경 시인의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이다.


<금지된 일기장>은 엄마가 일기장을 갖는다는 사실이 가족들에게 비웃음과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이 되는 시대의 이야기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엄마가 되고 보니 아득한 시절의 엄마 이야기에도 분명 공감이 되는 부분이 있음을 안다. 엄마가 되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이야기들이 엄마가 되고 나니 하나의 거대한 다른 세상처럼 펼쳐졌다. 그렇게 나는 이 세상 모든 엄마들의 이야기에 매료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이 책은 내가 사지 않고는 못 배길 책이었다.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은 단 두 문장으로 지어진 작가의 말에 매료되어서 샀다. '아삭아삭할 겁니다. 겨울을 견뎌 본 심장이라서요.' 아삭아삭, 겨울, 견디다, 심장... 제멋대로인 듯한 단어들이 이렇게나 잘 어우러진다는 게 황홀하게 느껴졌다. 작가에 대해 호기심이 생겨 곧장 검색을 해봤다. 작가 프로필에 인스타그램이 있어 들어가 보았더니 젊은 얼굴의 한 사람이 모습을 나타냈다. 내가 이십 대 때만해도 그 시절 좋아했던 작가들은 그 모습이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봐도 얼굴 사진 한 장 찾기가 어려웠다. 겨우 잡지 인터뷰 기사를 찾아내면 무척이나 작가다운, 사뭇 진지한 폼을 잡고 찍은 사진을 그나마 한 두 장 볼 수 있었던 게 전부였다. 그에 비하면 요즘 젊은 작가들은 얼마나 대중적이고 공공연한지. 나는 작가의 인스타를 오래 들여다보지 못했다. 내 마음을 휘어잡는 깊은 글을 쓰는 사람의 얇은 일상 모습을 보는 게 어딘지 좀 어색하게 느껴졌다. 왠지 더 이상 내가 젊지 않다는 증거 같았지만 구태한 마음은 숨겨지지 않았다.


책장에 읽지도 못하는 책이 쌓여만 갈 때 나는 죄책감을 느꼈었다. 이런 행위가 못내 사치스러운 것 같았다. 낭비하는 주부라니 내 형편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스스로 돈 한 푼 벌지 않고 살고 있으면서 효용 없는 일에 함부로 돈을 쓰다니 말이다. 잔소리 하는 사람 하나 없는데도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내몰았다. 겨우 책 몇 권에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은 자연스레 변했다. 살다보니 아이는 대체 어떻게 키워야 하는 것인지 고민이 늘어갈 때, 시부모님과의 관계는 왜 갈수록 어색해지는 것인지 답답해져 갈 때, 앞으로 나는 무얼 하며 돈을 벌어야 하나 막막하기만 할 때가 점점 많아졌다. 주부의 고민과 스트레스는 상상 이상으로 내밀하고 거대했다. 잘 갖춰진 가정의 행복 안에 스스로를 밀어놓고는 또 마냥 행복하지만은 못한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고, 모른 척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가끔은 내가 엄마가 되기 이전의 먼 과거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깨끗하고 고요한 집에서 홀로 책을 읽기만 하던 그때로 말이다. 회한에 잠길 때마다 읽지 않는 책이라도 사는 행위가 나를 위로했다. 위로는 달콤했고, 이 달콤함을 더 맛보기 위해 죄책감을 버렸다. 그리고 나는 더 뻔뻔하게 안 읽는 책을 사고 안 읽은 책을 팔았다.


읽지도 않는 책을 사는 이 사치스러운 습관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겠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고, 유치원에 가고, 학교에 가면 정말 내 시간이 생기는 걸까. 그때가 되면 나는 이 가정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한 또 다른 조건을 수행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또 내 시간을 미루며 살고 있지는 않을까. 마냥 낙관할 수만은 없는 현실이다. 그러니 어쩌면 지금 당장 시간을 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을지도 모른다. 또 사고 싶은 책이 생기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더 읽고 또 읽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생을 긍정하는 방법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이 건전한 취미가 앞으로 얼마큼이나 더 사치스러워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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