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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랑은 처음입니다만

by 열대나무


연애에 있어서 나는 늘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기다리고, 한밤에 고속버스를 타고 가서 기다리고, 큰 가방을 끌어안고 기다리고, 시린 손을 호주머니에 넣어가며 기다렸다. 기다림 끝에 내가 얻은 것은 상대방의 잘 계산된 사랑이나 미련을 딱지처럼 접은 납작한 내 마음이었다.


서른이 넘어가면서 나도 자존감이라는 게 생기기 시작했다. 더 이상 기다리는 사랑을 하지 않겠노라 굳은 다짐을 했다. 사실 기다리지 않는 사랑이란 게 뭔지도 잘 몰랐다. 그래서 나는 관계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방심의 틈이 보이면 내가 먼저 돌아서고 말겠다는 유치하고 얍삽한 계획이나 세우곤 했다.


치밀한(?) 계획 뒤에 만난 남편은 날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늘 그가 우리 동네로, 우리 집으로 와주었다. 그러나 제대로 사랑받아본 적 없는 사람의 마음이란 일정한 행복의 온도 속에서도 자주 불안해지기 마련이었다.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는 사소한 이유였다. 같은 이유로 여러 번 갈등이 생기자 나는 그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자꾸 이런 식이면 우리 헤어져야 할지도 몰라." 한껏 진지한 모습에 취한 내가 그 말을 내뱉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손가락으로 안경을 들어 올리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T 성향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눈물을 처음 본 나는 심히 당황했다. 괜히 죄짓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그리 큰 잘못을 한 건가 조금 의아했지만 그 눈물을 그냥 넘겨버릴 수 없었다. 눈물을 훔쳐 줄 용기는 내지 못했지만 나는 이런저런 다독이는 말로 얼버무리며 얼른 상황을 끝내야 했다.


눈물이 꼭 진심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을 나이였다. 그러나 분명 계산되지 않은 순간이었다. 그 눈물에서 나를 대하는 그의 순수한 마음을 다 엿본 것처럼 심장이 조여들었다. 내가 여린 마음에 상처를 낸 건 아닌지 미안했다. 행여나 나를 잃을까 낙담하는 마음이 절절히 느껴졌다. 이만큼이나 순수한 사랑을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었던 나는 그때 확신했다. 그가 내게 유일한 사랑을 주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말이다.


사랑을 주는 것은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일이다. 상대의 만족으로 내 기분이 결정되는 지점이 많다. 하지만 사랑을 받는 것은 나를 먼저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 속에는 사랑을 기다리기만 할 때는 몰랐던 안정과 만족이 함께 있었다. 하늘 한가운데를 둥둥 떠다니다가 마침내 낙하산을 펴고 땅에 단단히 발을 내딛는 기분 말이다. 생을 언제까지나 허공을 떠다니 듯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랑받는 기분에 취한 나는 마침내 그의 사랑을 중력 삼아 땅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그가 흘렸던 눈물이 정녕 순수였는지 삿된 연기였는지 까마득해지고 아리송해지고 있던 요즘 나는 또 한 번의 순수한 사랑 고백을 받았다.


요즘 35개월의 딸아이는 고집부리고 떼쓰기에 한창이고, 나는 그 아이를 훈육하느라 진땀을 빼는 중이다. 딸이라 그런지 말이 빠른 편이어서 내 말에 사사건건 말대꾸를 하는데 정말 얄미움에 분통이 터져나갈 지경이다. 그렇게 예뻤던 아이가 이렇게 미울 수 있나 싶은 순간이 많아졌다. 그러나 돌아서서 생각하면 겨우 세 살짜리의 행동에 감정을 감당 못하는 내가 못내 한심해지기도 했다. 고심 끝에 나는 무관심이라는 훈육 무기를 꺼내 들었다. 아이가 이보다 더 어릴 때는 무관심이 참 어려웠다. 앙앙 우는 모습도 마냥 예쁘기만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보다 쉬운 게 없다. 떼쓰는 아이가 미운 만큼 나의 무관심 기술은 더욱더 프로다워졌다.


외출을 해야 하는데 아이는 씻지 않겠다고 요리조리 내빼는 중이었다. 타이머를 해놔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는 시점이 되자 나는 언성을 높였다. 아이는 내가 조금만 언성을 높여도 싫어한다. 그때부터는 엄마가 언성을 높였다는 이유로 울기 시작한다. 바닥에 주저앉아 밑도 끝도 없이 울어대자 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아이를 지켜보았다. "이렇게 계속 울기만 하고 씻지 않으면 외출하지 않을 거야." 한 차례 경고를 날리고 나는 아이를 쳐다보는 눈빛도 거두었다. 아이에게 등을 돌리고 앉았더니 아이가 울면서 내 앞으로 와 앉았다. 그리고는 자꾸 내게 안기려 했다. 이 상황이 끝나기 전에는 안아줄 수 없음을 알리기 위해 나는 아이를 밀어내고 다시 앞에 앉혔다. 그러자 갑자기 아이가 엉엉 울면서 말했다.


"엄마,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엄마, 사랑해요."


훈육 중에 쏟아지는 뜬금없는 사랑 고백에 나는 당황했다. 이런 반응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어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나는 과거 남편과의 그날처럼 대충 상황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누그러진 말투로 아이를 달래고 안아주면서 훈육이 끝나버렸다.


한때 나는 2004년도에 방영했던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열혈 팬이었다. 매주 시간 맞춰 드라마를 한 회 한 회 챙겨봤다. 이 드라마는 지금 생각해도 명작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울지 않고는 못 배길 스토리도 그렇지만 모든 배우들이 그 역할에 찰떡인 듯 연기를 잘했다. 두고두고 기억나는 명장면, 명대사는 여럿이지만, 나는 엉엉 울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아이를 보며 이 드라마의 한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기 같은 얼굴을 한 여주인공이 무표정의 남주인공을 앞에 두고 엉엉 울면서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아저씨.' 하며 고백하던 그 장면 말이다.


내 머릿속에는 자꾸만 이 두 장면이 오버랩되어서 떠오른다. 내용 상 전혀 상관없지만 상황은 똑같다. 어린 얼굴로 엉엉 울면서 사랑한다고 외치는 모습과 앞에 서 있는 무표정한 상대까지도 말이다. 그 시절 나는 이 장면이 한국 드라마 사랑 고백 장면에 한 획을 그었다고 생각했다. 어떤 미사여구도 없이 오직 사랑한다는 말로만 전하는 고백이 온 시청자의 마음을 흔들었다. 사랑한다는 말 외에는 그 어떤 표현도 그 말을 대체하지 못할 것 같았다. 게다가 여주인공의 맑은 눈망울에서 떨어지는 이슬 같은 눈물까지 더해지니 이보다 더 순수한 사랑 고백 장면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십 수년이 지난 지금 엉엉 우는 세 살배기 아이를 앞에 두고 그 장면을 떠올리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아이에게 엄마는 우주라고 한다. 온 세상의 전부 말이다. 아이에게 눈물 젖은 사랑을 고백받은 후 나는 내가 이 정도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생각했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나를 사랑하는지. 내 사랑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잃을까 서글퍼하는지. 사실 그날 아이가 무슨 마음으로 그런 사랑 고백을 했는지 그 속을 다 알 수는 없다. 단순히 엄마에게 혼나고 싶지 않아 딴에는 묘수를 부린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전해 받은 느낌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커지고 커져 터져 나온 간절한 마음 같았다. 이렇게 진지해도 되나 싶지만, 문득문득 그날의 아이 얼굴을 떠올릴 때면 나는 내가 지금 얼마나 농도 짙은 사랑을 받고 사는지를 깨닫는다. 그러면 지금 내 생활이 한결 새삼스러워지고, 삶에 겸손해지며, 매 순간 아이를 소중히 대하고 싶어진다.


사랑을 기다리기만 하던 사람이 결혼하고 엄마가 되어 이제는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순수한 사랑은 처음이라서 때론 낯설기도 하다. 하지만 그 사랑이 나를 아내로, 엄마로, 그리고 또 나로 살게 한다. 사랑받는 자의 자부심은 내가 이전과는 다른 좀 더 나은 선택을 하게 한다. 사랑을 기다리기만 할 때는 타인을 중심에 놓고 선택하는 때가 많았다면, 사랑을 받게 되니 나를 중심에 놓고 선택할 줄 알게 되었다.


울보 부녀에게서 받은 사랑 속에서 매일 생의 바람들이 속속 피어난다. 남편을 위해 좀 더 현명한 아내가 되고 싶은 바람, 아이를 위해 좀 더 지혜로운 엄마가 되고 싶은 바람, 그리고 나를 위해 좀 더 단단한 내가 되고 싶은 바람 같은 것들 말이다.


이제 나는 매일 살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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