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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추구미는 스님

by 열대나무




한때 나는 비구니가 되고 싶었다.


서른을 앞두고 시청 콜센터에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민원인에게 이유 없이 욕먹고, 상사에게까지 뜻 모를 꾸중을 듣고 집에 오던 날이면 사는 게 정말 못 견디게 지긋지긋했다. 외면하고 싶은 내 삶의 민낯을 정면으로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분노하는 마음, 절망하는 심정, 허탈한 심사를 끌어안고 걸레를 빨아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방바닥을 닦았다. 더위가 한창이던 계절에도 에어컨 한 번 켜지 않았다. 그저 땀을 뻘뻘 흘리며 이미 깨끗한 원룸 바닥을 닦고 또 닦았다. '삶은 수행이다'라는 말을 되뇌며 힘듦을 힘듦으로 지워나갔다. 지금 생각보면 더없이 미련한 습관이었지만 나는 그 속에서 삶이 꼭 즐거움으로만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홀연히 깨달았다.


어느 날 그것마저 해낼 기력이 없을 때는 그저 다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파르스름하게 머리도 깎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긋지긋한 이 삶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변명 같고 도피 같은 생각이었지만 비구니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 한결 숨통이 트였다. 삶에 또 다른 방식이 분명히 있다는 위안이었다. 속세를 다 버리는 수행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은 깊이 해보지 않았다. 그런 어리석은 마음이었지만 삶을 모조리 버리겠다는 생각보다는 훨씬 낫다고 여겼다. 생각만으로 위로를 얻을 수 있다면야 그게 무엇이든 어떤가 싶었다. 삶의 밑바닥과 가장 가까이 심장을 대고 살던 그 시절 내게 비구니가 되는 것은 내가 가진 삶의 마지막 보루였다.


생각해 보면 스님과의 인연은 이보다 더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스무한두 살 무렵 나는 우연히 몇몇 스님을 알게 되었다. 여행 중 템플스테이를 하러 들른 절에서 그곳의 주지스님과 인연이 되어 그 절에 몇 달을 머물기도 했다. 또 불교대학을 다니는 친구의 인연을 통해 한 비구니 스님을 만나기도 했다. 스님들과 알고 지내는 시간이 무르익게 되자 그들은 내게 은근히 스님이 될 것을 권했다. 특히 주지스님은 내게 "너 스님 돼라."라고 하시며 직접적으로 말씀하셨다. 삼천배는 할 수 있지만 어쩐 일인지 끝내 불심은 못 기른 나는 그런 스님의 말씀에 "저는 두상이 안 예뻐서 안 됩니다, 스님." 하며 거절했다. 그런 내 대답에 호탕하게 웃으시던 스님의 얼굴이 아직도 선하다. 설마 내게 무슨 스님의 깜냥이 있었겠냐 싶다. 그저 어리고 젊은 친구가 조용히 스님을 종종거리며 따라다니는 모습이 그들에게 예뻐 보여서 그러지 않으셨을까 싶다.


그로부터 내내 어쩌다 보니 내 인생은 불교와 스님 이미지의 여운 속에 머물러 있다.


요즘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TV 프로 중 하나는 <한국기행>이다. 설거지할 때나 요리할 때, 밥 먹을 때마다 휴대폰으로 틈틈이 영상을 챙겨 본다. 특히 마음이 복잡하고 힘들 때는 부러 챙긴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건 절밥 기행, 암자 기행, 산사의 하루 등 스님의 일상을 주제로 다룰 때이다. 그런 영상들은 봤던 것을 또 보고 또 봐도 좋다. 스님들의 질박한 생활이 담긴 하루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금 내가 가진 욕심들이 쉽게 보이고, 쉽게 놓아지기도 한다.


작은 암자에 홀로 사는 스님들은 어느 계절이든 온몸으로 하루를 산다. 깊은 산속에서 한 짐 나무를 해 지게에 짊어지고 가는 스님에게 힘들지 않으시냐고 물으면 스님은 힘든 것이 인생인데 어찌 힘든 것을 마다하겠느냐고 답한다. 그리고 무거운 지게를 내려놓을 때 그저 홀가분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다. 눈이 내리면 눈 내리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며 무상함을 배우고, 봄이 오면 흐르는 계곡물을 가만히 바라보며 작은 것에도 만족하는 마음을 깨친다. 그런 삶을 보고 있노라면 내 삶에 정말 필요한 조건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보는 것만으로도 수행을 한 듯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리고 생은 사실 내게 그리 별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리게 배운다.


그렇지만 나는 불심 깊은 불자는 되지 못했다. 그건 내가 노력한다고 노력만큼 되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모든 불교와 스님의 실상이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깨끗하고 존경스럽지 않다는 사실도 잘 안다. 내가 스님이 되지 못한 건 결국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그럼에도 나는 항상 불교와 스님이 가진 이미지를 좋아하고 추구한다. 그들이 소비주의에 물들지 않은 소박한 삶을 사는 모습, 외형 가꾸기에 힘쓰지 않고 내적 에너지에 집중하는 삶을 사는 모습, 그리고 독립적인 삶을 사는 것들이 내가 배우고 싶은 가치들이다.


'추구미'라는 신조어가 유행이다. 그 뜻은 '추구하다'의 '추구'와 아름다움을 뜻하는 한자어 '미(美)'를 합친 말로 자신이 지향하고 원하는 미적스타일이나 이미지를 가리킨다. 이 용어는 잘파세대(90년대 중반~20년대 후반에 출생한 Z세대와 2010년 이후 출생한 알파세대)의 정체성이나 그들의 소비 행태를 설명할 때 쓰이곤 한다. 얼마 전 어느 연예면 기사에서 TV프로에 나온 평범한 가정의 한 엄마가 장원영이라는 아이돌 이미지를 추구하기 위해 많은 돈을 쓴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걸 보면서 나보다 어리고 예쁜 사람을 닮고 싶어 한다는 게 그자체로 이미 너무 불가능한 일 아닌가 싶어 좀 의아했었다. 그리고 나의 추구미는 무엇일까를 잠시 고민했다.


SNS에는 예쁘게 잘 꾸미는 엄마들이 정말 수도 없이 많다. 살림을 예쁘게 해서 주목받는 엄마, 외형적으로 예뻐서 주목받는 엄마 등 외형 꾸미는 것에 몰두하는 분위기가 많다. 처음에는 나도 그런 모습들을 보고 무작정 따라 해보고 싶은 마음을 가졌었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 육아를 하고 살림을 하다 보니 그게 얼마나 불가능하고, 어려운 일인지 저절로 깨달아졌다. 아이 밥그릇 하나 사는 데 여러 번 돈을 쓸 수 없고, 사회생활도 안 하는 주부가 필요도 없는 옷을 철마다 살 수는 없었다. 외형과 살림을 꾸미는 데에도 많은 내적, 외적 에너지가 필요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엄마지만 스님을 추구미로 삼으니 모든 게 간단해졌다. 살림도 외형도 단출하지만 깨끗하게만 유지하면 됐다. 소비를 할 때에도 '남들 보기에 이 정도는 사야 되지 않나?, 요즘 이런 게 유행하지 않나?' 싶은 마음들이 사라져 좀 더 현명한 소비를 할 수 있었다. 꾸미지 못하는 게 아니라 꾸미지 않는다고 여기니 마음이 훨씬 편안했다. 스님의 생활처럼 단순하고, 소박하게 사는 것이 내 성격과 삶의 가치에 딱 맞아떨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며칠 전부터는 아침마다 108배와 명상을 하고 있다. 아이가 태어나던 무렵부터 매일 새벽 108배하고 명상하는 수행을 해보고 싶었는데 육아로 인해 할 수 없었다. 낮에라도 좀 할라치면 아이가 다가와 온몸으로 치대는 통에 오래 이어나갈 수 없었다. 이제는 아이도 어느 정도 컸으니 되겠다 싶어 얼마 전부터 다시 시작했다. 운동도 하고, 흐리멍덩해진 정신도 단단히 붙잡기 위해서다. 6시 즈음 아이와 함께 기상하면 아이 아침밥을 챙겨주고 나서 나는 바로 안방에서 108배를 시작한다. 아이는 관심을 보이며 내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기도 하고, 끊임없이 말을 걸기도 하고, 방석 위까지 올라와 방해를 하기도 한다. 나는 함께 절을 하기도 하고, 간간히 대꾸해주기도 하고, 심지어 절을 하다가 똥 마렵다는 아이를 변기에 앉히고 똥을 닦아 주기도 한다. 그리고 방해가 심해질 때는 "엄마 지금 절 운동 하는 거야. 방해하면 안 돼." 하며 단호하게 경고한다. 생각보다 아이는 쉽게 수긍해줬다. 이제는 정말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오래오래 108배와 명상을 이어나가고 싶다.


남편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진짜 스님이 되었을까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아마 중간에 짐싸서 돌아나왔더라도 한 번은 도전해보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삶에 뭐 별다른 뾰족한 수를 가지지 못한 우매한 중생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도 내 삶의 자리가 이곳이 딱 맞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아이라는 삶의 뿌리가 생겼으니 맞고 안 맞고를 떠나 그저 자리 잡고 사는 것 뿐이다.


예쁜 엄마들이 넘쳐나는 시대지만 스님처럼 살고 싶은 엄마도 있다. 외형 꾸미기보다는 내적 단단함을 더 최고의 가치로 삼으며 살고 싶은 사람도 있다. '삶은 수행이다'는 말처럼 수행자가 별다른가. 일상에서 매일 절제를 실천하고, 요리하는 것, 청소하는 것과 같은 모든 소소한 일들을 공들여 해내면 그것 자체로 수행이다. 여느 보살님들처럼 깊은 불심은 가지진 못했지만, 불교와 스님은 내게 늘 삶에 위안과 휴식을 주는 고마운 존재다. 궁극적으로 나는 정보가 넘쳐나고, 유행에 민감한 이 시대에 나와 맞지 않는 가치에 흔들리지 않는 그런 단단한 엄마로 자라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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