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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 번아웃, 그 잔잔한 폭풍의 날

by 열대나무




삼월의 첫날, 미지근한 커피 같은 온도가 집안을 감돌았다. 봄기운이 제법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나는 창문을 열고 흐린 하늘을 곧게 응시했다.

숨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내쉰 뒤, 이번에는 내 속에 웅크리고 있는 흐린 마음을 세차게 노려보았다.


며칠 전부터 내 마음 한가운데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의지'가 굳건히 서 있다.

100년 된 나무처럼 아주 거대한 모습으로.


같이 일어난 아이는 눈곱도 떼지 않은 눈을 반짝이며 아침부터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밤사이 깊은 잠에서 길어 올린 양질의 에너지를 마음껏 뽐내듯이 말이다. 정말이지 부러운 아우라다. 네 살 아이가 가진 에너지는 맑고, 짙고, 깊다. 아침이면 늘 아이에게서 순도 높은 청량함이 뿜어져 나온다.


어떻게든 저 어린것의 아침밥은 챙겨 먹여야 한다는 질긴 모성으로 나는 주방에 들어갔다. 냉장고에서 얼마 전에 만들어 두었던 짜장을 꺼내 레인지에 데우고, 이어 냉장해 둔 밥도 꺼내 데웠다. 그 둘을 그릇에 적당히 덜어 수저로 비비고 있는데 아이가 물었다.


"엄마, 비빔밥이에요?"

"아니, 짜장밥인데?"

"아이~ 싫어요~. 비빔밥 해주세요. 비빔밥이요~!!"


난데없는 비빔밥 타령에 당황스러운 감정이 몰려왔지만 나는 최대한 명랑하게 대응하려 애썼다. 비빔밥은 저녁에 꼭 해주겠다고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하고, 짜장밥을 잘 먹으면 좋아하는 비타민 사탕을 주겠다고 했다. 어떻게든 아이 아침밥 먹이기 미션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어제부터 줄곧 어질러져 있는, 와중에도 계속 어질러지고 있는 거실을 보고 있으면 내 속에 남아 있던 일말의 생기가 잔연기를 피우며 꺼져버린다.


빨래통에 가득 찬, 그러고도 넘쳐흘러 바닥에 널브러진 빨랫감들을 보고 있으면 빨랫감들처럼 내 속에 있는 것도 토해낼 듯한 역겨운 감정이 일렁댄다.


아직 손대지 못한 식재료들이 있는, 벌써 유통기한이 지났지만 뜯지도 않은 숙주 봉지 같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는 냉장고를 열어 보고 있으면 갑갑한 감정이 올라오고 심장이 돌처럼 굳어지는 것 같다.


집안일은 생명력 강한 잡초 같다. 해내도 해내도 또 해낼 것들이 생겨난다. 주부가 조금이라도 게으를라치면 속속 생겨난 온갖 집안일들이 이 좁은 집안을 한가득 점령한다. 내겐 그 생명력을 당해낼 체력과 재간이 늘 조금씩 부족하다. 일을 미루지 않고 조금씩 부지런히 해내겠다는 의지 하나로 버티지만 그마저도 못하겠는 날이 더러 있다.


그럴 때 나는 최대한 무신경하게 쌓인 집안일들을 쳐다본다. 아무 감정 없이 쳐다보다가 이내 싸우는 마음이 든다. 집안일을 해치워야 한다는 강박과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고집이 뒤척인다. 그러면 더 눕고 싶고, 자고 싶다. 시끄러운 모든 감각의 스위치를 내리고 싶다.


정오가 다 돼 가지만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해내지 못했다. 내 속에 있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의지'라는 나무가 초단위를 다투며 커지는 것 같았다. 나는 애써 그 마음을 모른 척했다. 점심에는 시부모님과 외식을 했고, 오후에는 대형마트를 들렀다.


오후 여섯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장 본 것들을 들고 집에 도착했다. 집안을 점령한 집안일들은 여전히 무성했고, 어둠을 배경으로 두르니 한층 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신기한 건 남편과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집안일이 이렇게 쌓여있는데 그들은 항상 집을 반가워하고, 편안해한다. 마치 그들 눈에는 해치워야 할 집안일 같은 건 결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젓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힘을 내보기로 했다.


먼저 아이를 씻기고, 아이에게 오늘 저녁은 빵을 먹는 게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었다. 여전히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어 손대지 않은 식재료들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빵을 먹이는 것에 일말의 죄책감이 들었지만, 죄책감을 음미하기도 전에 빵을 먹는 게 어떠냐는 말이 먼저 튀어나오고 말았다.


"엄마, 비빔밥 먹기로 했잖아요~. 잊어버렸어요~?"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아, 그랬었지..." 하고 대꾸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주방으로 들어가는데, 눈치 빠른 남편이 아이에게 포도주스와 같이 빵을 먹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아이는 밝은 표정으로 예스를 외쳤다. 나는 아이 마음이 바뀔세라 얼른 통밀식빵 한쪽을 토스터기에 넣고, 포도주스를 컵에 따랐다. 그리고 치즈와 쨈, 바나나를 썰어 같이 내어주었다.


나는 시댁에서 얻어 온 참외와 함께 며칠 전부터 식탁 위를 나뒹굴고 있는 크로와상을 저녁으로 먹었다. 빵을 우적우적 뜯어먹고, 참외를 아삭아삭 씹었다. 빵은 눅눅하고 질긴 고무 같았고, 참외는 풋내가 나는 딱딱한 나무 같았다. 입을 열심히 오물거렸음에도 내 시선 끝에는 주방에 쌓여 있는 새로 사 온 식재료들, 화장실 앞에 넘쳐흐르는 빨래통, 계속 지저분해지고 있는 거실 풍경이 자꾸만 대롱대롱 매달렸다. 내 속에는 아직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요동치는데, 온갖 집안일들이 나를 실시간으로 옥죄는 느낌이었다. 흘러넘친 빨랫감들이 내 손을 묶고, 어질러진 장난감들이 내 발을 묶고, 산적한 식재료들이 내 입을 봉하는 것 같았다.


나는 불현듯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갔다. 가방을 꺼내 노트북을 넣고, 이번에 새로 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개정판 소설책을 넣었다. 점퍼를 입고 가방을 멘 채 거실로 나가자 남편과 아이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선 나를 쳐다봤다.


"엄마, 어디 갈라구?"

"엄마, 공부하고 올게!"


아이는 안 된다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떼를 썼다. 아빠랑 재밌게 놀고 있으라고 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내 다리를 붙잡고 떼쓰고, 내 품으로 파고들어 끌어안았다. 엄마가 가는 건 절대 안 된다고 세상 애절하게 말했다.


남편과 나는 아이를 오래 달랬다. 아빠와 재밌게 놀자고 남편이 발랄한 표정으로 아이를 유혹했고, 나는 부드러운 말투로 엄마 할 일 조금만 하고 오겠다고 아이를 안심시켰다. 그러자 아이는 마침내 불안하고 아쉬운 표정으로 내게 안녕을 건넸다. 몇 번이고 내게 다시 와서 안기고, 인사하고, 뽀뽀를 했다. 그러고도 상기된 아이의 빨간 볼이 눈에 밟혔지만, 나는 모른 척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입술을 앙다물고 조금 비장하게 걸었다. 휴대폰으로 최유리 노래를 틀고 이어폰을 귀에 꽂자, 마치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감각이 되돌아온 듯 감미로웠다. 봄기운이 살짝 녹아든 밤의 분위기도 좋았다. 늦은 밤 홀로 걷는 것만으로도 잠시 해방된 기분이 들었다.


카페에 자리 잡고 앉아 아껴두었던 소설책을 펼쳤다. 나는 흡, 짧은 숨을 들이마시며 첫 장을 읽어나갔다. 첫 장 12번째 줄, '삼월의 첫날이었다.'는 문장을 읽다가, 나는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삼월의 첫날에, 삼월의 첫날의 글을 읽는 기분이 묘했다. 나는 삽시간에 작가와 주인공의 감성에 매료됐고, 그간의 앓던 마음과 복잡한 일들이 모두 잊히는 것 같았다. 내가 이 책을 미리 사 둔 것도, 내가 그렇게 내 시간을 갖고 싶어 안달했던 것도 모두 삼월의 첫날에 이 책을 읽으려고 짜 맞춘 운명인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이 다 착각일지라도 좋았다. 잠시나마 가진 짧은 나만의 시간을 운명처럼 짙게 만끽하고 싶었다.


이 책을 다 읽고, 아주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간다 해도 집안의 모든 것들은 소름 끼치도록 그대로겠지. 어질러진 거실, 넘쳐흐르는 빨래통, 손대지 않은 식재료로 가득 찬 냉장고, 그리고 또 그 밖의 모든 집안일과 육아 말이다. 그래도 폭풍이 이 정도로 그친 것에 안도한다. 늦은 밤의 카페, 최유리의 노래, 전경린의 소설. 겨우 이런 것들로 다시 집으로 돌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음에 마음이 가볍다.


(에필로그 : 9시가 넘어서 집에 돌아갔는데 아이는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잠자리에서 계속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고 있었더랬다. 나는 손발만 씻고 얼른 아이를 품에 안아 재웠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샤워를 하고, 늦은 밤 냉장고를 열어 내일의 비빔밥을 위한 식재료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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