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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스트 Aug 16. 2018

애증의 그 이름, 가족이란 관계

가깝고도 먼 나와 그들사이

초등학교 때 미술시간이 제일 싫었습니다. 선생님이 '화목한 우리 집'을 그리라고 하는 날이면 짝꿍의 그림을 몰래 훔쳐보며 따라 그렸습니다. 그땐 너무 어려서 마음이 힘들기보단 화목이란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워서 싫었던 걸까요. 중학교 때는 가족끼리 외식 간다는 친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처음으로 '부럽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제일 친한 친구 집에 초대되어 친구의 부모님을 보았을 때는 '드라마에서 보던 화목한 가정이 이런 거구나'라고 느꼈습니다. 모두 나와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돌이켜 보면 나에게 집은 편안함과 따듯함을 주는 익숙한 곳은 아녔습니다. 늘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하고 서먹한 곳. 가족이란 존재도 같았습니다.

딱히 집안 사정이 어렵거나 부모님이 불화로 싸우는 것을 본 기억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근데 유독 가족이란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회사에서, 연인과의 관계에서 내가 증오하고 닮고 싶지 않아했던 엄마의 모습이 나올 때마다 절망스러웠습니다. 내가 그토록 무시했던 아빠의 성향이 나타날 때마다 나를 부정해보기도 했습니다. 그 모습들이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올 때마다 내 자존감은 바닥까지 내려갔습니다.


어느 정도 내가 다 컸다고 느꼈을 무렵 엄마는 슬쩍 말문을 열며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빠와 결혼하고부터 시작된 시댁과의 갈등, 문제들을 회피하며 가족에겐 무관심하던 아빠의 태도에서 엄마가 겪은 절망과 우울. 엄마도 당신 자신이 여유가 없었고 육아가 처음이었기에 자식들에게 공감과 애정을 줄 수 없었다는 말. 그래서 본인도 너무 힘들었다는 말이었습니다.


솔직히 엄마가 너무 불쌍했습니다. 아빠도 이해는 갔습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서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럼 나는? 나는 안 불쌍한가? 대체 나는 누가 위로해주지

차가운 부모님의 태도를 보면서 마음 한구석 의지할 곳이 없었고 항상 외로웠습니다. 정서적으로 부모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자식으로서 보호받지 못했다는 현실에 분노가 끓어올랐습니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사랑만 하기도 힘든데 애증의 관계까지 가는 우리 가족


어린 맘에 부모님을 증오했다가 그래도 '우리 엄마, 아빤데 그런 생각 하는 거 아니야'라는 마음이 항상 같이 있었습니다. 두 세계를 사는 기분으로 죄책감과 증오심을 반복하며 자라왔을지도 모릅니다.

자라면서 감정이 무뎌지고 사랑인지 증오 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관계를 끊어야지 끝나는 게임처럼 생각했습니다. 하루하루 소모뿐인 감정싸움으로 지쳐가면서 자신도 망가져가는 줄 모르는 체 말입니다.

왜 가족이란 이름으로 무한한 이해를 바라고 날카로운 말들을 서슴없이 하게 될까요? 세상에서 하나뿐인 사람들인데.


내가 이렇게 된 건 모두 부모탓이야


저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부모에게 사회화를 배우고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낮은 자존감과 불편한 인간관계의 뿌리는 모두 가정에서 나옵니다.

프로이트반복 강박 개념에 의하면 어린 시절에 제때 풀지 못한 갈등은 어른이 되어서도 어떤 형태로든 계속 반복해 되풀이된다 합니다. 무의식 중에 가족에게 받은 상처, 수치심, 비난은 나의 자존감을 갉아먹고 맘속에서 자라게 됩니다. 자신을 아무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학대하면서 말이죠. 


이런 사람들은 자라서 가정을 꾸리거나 사회생활을 할 때 나 이외에 무관심하고 본인만 아는 무관심하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비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속 마음은 아닌 거죠. 어떻게 해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존중해 줄 수 있는지 방법을 모를 뿐입니다. 아마 우리 윗세대 부모들이 겪었던 과정이 이런 상황이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잘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를 뿐.



부모의 노릇도 처음이라

 

모두가 처음은 서툽니다. 우리 엄마, 아빠도 그렇겠지요. 처음 부모가 된 것이니까요. 그들도 윗세대에서 충분한 애착과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상처와 분노를 마음속에 키워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식을 양육하고 책임감에 짓눌려 삶을 살아내느라 앞만 보고 달렸겠죠.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성장했습니다. 상처는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가족문제를 끊기 위해서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정확히 직면하고 문제를 끊어버리기 위해 노력이 필요합니다. 즉 자신의 감정의 실체를 보는 것이죠. 자신이 왜 화를 내고, 분노하고 있는지를. 단순히 상대의 잘못 때문인지, 아니면 내 안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가족과 연인에게 푸는 것은 아닌지 실체를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원가족에서 받았던 상처를 지금의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푸는 일을 끊어야 합니다. 정서적으로 부모에게서 독립하는 것. 그리고 원가족에서 받은 상처와 분노의 고리를 끊는 것. 이것을 심리학자 보웬은 '자아 분화'라고 했습니다. 이런 자아 분화가 이루어져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되면 건강한 가족을 이룰 수 있습니다.   


행복한 가족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족은 불행의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중>


가족도 작은 인간관계입니다. 혈연으로 이뤄진 관계라는 특이사항이 있을 뿐이죠. 위의 이야기뿐 만이 아니라 부모님이 자식의 삶에 개입하여 일어나는 사건들은 정말 다양합니다.

가족은 나의 의지로 선택하여 맺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건을 해결하는 성향보다는 묵인하고 어쩔 수 없는 문제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말합니다. 다들 그러고 사니 용서하고 이해하라고. 하지만 애매한 용서와 나를 돌아보지 않는 이해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가족이라고 무조건적인 이해와 배려를 해야 하는 건 아니까요.

먼저 상처받은 그 시절의 나에게 손을 내밀고 그 마음을 헤아리고 다독여 주는 것. 이후에 부모의 입장에서 나에게 했던 행동들을 생각하고 당신들이 했던 행동도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부모도 실수할 수 있구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그 고통의 무게는 다른 누구도 헤아릴 수 없지만 그 고통을 흘려보내지 않으면 상처에 머물러 있는 '어린 나'는 성장하지 못하고 그때의 고통을 다시 누군가에게 똑같이 행동합니다.


혼자 객관적으로 나의 감정을 파악하고 어떤 상처로 인해 내가 분노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땐 전문 심리상담가와 함께 과거의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상처가 감기 낫듯이 한 번에 치유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걸리고 그 과정에서 오는 고통이 나를 더 힘 들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의미 있는 노력입니다. 왜냐면 가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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