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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란현 작가 Sep 01. 2023

노끈을 가위로 자르는 "여유" 시간

학생들 교과서를 나누어 주었다. 1층 중앙현관에 있었던 교과서 150여 권씩 일곱 권을 3층 연구실 앞으로 배달해 두었다. 업체에서 해둔 줄 알았더니 방학 중에 학교 온 동 학년 선생님이 미리 옮겨 둔 것이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개학 날 교과 전담교사 수업이 없는 날이다. 담임 수업으로 채우면서 중간에 교과서 일곱 권을 나누어 주었다. 노끈과 박스, 교과서 묶음 사이에 있던 작은 박스 조각까지. 반별로 교과서를 가져갈 때마다 치울 쓰레기도 쌓였다.


상황이 될 땐 함께 치우겠지만, 내가 가장 가까운 반을 맡고 있으니 박스와 노끈 모아둔 것을 내가 버리기로 했다. 다른 반은 교실과 연구실 위치도 나보다는 멀다. 내가 하는 것이 마땅하고 그렇게 하라는 뜻에서 연구실과 교실이 가까운 편이다.


재활용 박스는 급식 먹으러 갈 때 다섯 명 친구들에게 1층으로 내려가는 김에 버려달라고 부탁했다. 노끈은 재활용이 되지 않는다. 박스 두 개에 모아둔 노란색 노끈을 내 교실 앞자리에 갖다 두고 밥을 먹으러 갔다. 복도에 남겨두면 손 빠른 다른 선생님들이 치우면 힘드실까 봐 우리 반에 쓰레기를 감추었다.


밥을 먹고 올라오면서 지도서를 수레에 싣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연구실에 오니 2시 회의 시간까지 30분 남짓 남았다. 연구실 밖에는 여전히 남은 교과서가 있길래 여분인 것 같아 연구실 탁자에 올려두었다. 연구실과 내 교실 사이에 복도에는 추가로 쌓인 노끈과 박스가 있다.


지도서와 과목별 교사 USB 자료를 여섯 반이 가져갈 수 있게 탁자 위에 쌓아두었다. 수레 1층에 갖다 둘 예정이니 빈 박스를 수레에 올려두고 연구실에 버릴 교과서는 없는지 살폈다. 손 빠른 선생님들이 50권 이상 책을 빼낸다. 버리지 않으면 2학기 교과서 꽂을 자리도 없었다. 수레 가득 찼다. 1층 폐지 창고에 갖다 버리고 올라오니 2시 5분 전이다.


2학기 운영을 위해 평가, 현장학습, 시간표 회의를 하고 나니 3시 전체 모임이 있다는 사실 알게 되었다. 모든 모임이 끝난 후 교실에 오니 힘이 빠진다. 종일 앉아 있을 겨를 없었던 것 같다. 이러다가 기분도 다운되겠다.


교실 앞에 노끈 두 박스가 있네. 이걸 치워야 한다. 가위와 비닐봉지 그리고 유튜브 노래를 준비했다. 노동요 들으면서 노끈을 잘게 자른다. 자르지 않으면 비닐이 터질 우려가 있으니 촘촘히 잘라본다. 단순노동을 하다 보니 머리가 가벼워진 것 같다.

두 개 박스에 쌓인 노끈이 20리터 쓰레기봉투에 딱 맞게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비닐봉지 속 노끈을 더 눌러 다른 쓰레기도 담고 싶지만 비닐이 노끈에 찔려터질 것 같다. 쓰레기봉투는 잠시 후 퇴근하면서 버릴 생각이다.


쓰레기 정리 좋아하지 않았다. 귀찮고 시간 빼앗기는 것 같았다. 정신없는 개학 날 크게 표시 나진 않지만 노끈 자르는, 의미 없다고 여기는 시간 덕분에 마음 여유 찾았다. 아이들 앞에서 노끈 자르고 있었다면 아이들도 분명 가위 들고 옆에 왔을 것이다. 함께 정리하는 시간, 아이들을 위한 교과서 박스. 오늘 아이들과 같이 노끈 처리해도 문제 될 건 없었겠지만 오늘은 나만의 여유시간으로 잠시 쓰레기봉투를 채웠다.


교과서 나눠 주는 일, 박스와 노끈 정리하는 일. 자주 있는 일이다. 겨울엔 더더욱 교과서 박스를 버리지 않고 모아 교실 짐을 담기도 한다. 교실 이사가 초등에서는 큰일이니까. 이번엔 박스도 시원하게 버렸다.


사소한 일이라도 어떤 마음으로 임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2학기에는 교과전담 시간이 3시간 줄어든다. 담임 수업이 3시간 늘어난다는 뜻이다. 분주할수록 잠시 컴퓨터에서 벗어나 교실을 둘러봐야겠다. 앞에서만 아이들 보지 않고 뒤에 서서 아이들 관찰하는 시간도 가져봐야겠다.


https://blog.naver.com/true1211/22319200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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