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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란현 작가 May 30. 2024

의미 부여와 존재가치

책등이 낡은 그림책 <거미 아난시>를 읽어주었다. 집에서는 딸이,  교실에서는 내가 그림책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어제 <재주 많은 다섯 친구>읽어주다가 생각난 <거미 아난시>를 오늘은 꼭 읽어주리라 교탁 위에 올려두고 퇴근했다.


책등을 보여주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빨간색이 사라졌지요? 책이 낡았다고 해서 내용까지 재미없는 건 아니에요."

내가 읽어주기 전까지는 반에서 낡아서 자리를 차지하는 책일 뿐이다. 아이들에게 표지를 보여주고 내용을 읽어준 책, 읽어주다가 중간에 멈춘 후 서로의 의견을 들어본 책으로 의미를 부여했을 때 <거미 아난시>는 우리 반에서 보물이 되었다.

교탁 위에 올려둔 후 만지지 못하게 했다. 며칠간 내 주변을 맴돌며 친구들은 만지작거릴 테지.


1학년 연구실 테이블에 그림책 30권을 진열했다. 인쇄물을 나에게 가져다주기 위해 자주 연구실 문을 여는 최똑똑이가 <욕심쟁이 딸기 아저씨>그림책을 눈여겨보았나 보다.

"선생님 <욕심쟁이 딸기 아저씨> 읽어주세요."

최똑똑이가 읽어달라고 하면 읽어줘야지. 읽어달라는 소리가 반갑다. 아이들에게 딸기가 가득 재여 있는 딸기 아저씨 집을 보여주다가 내방이 생각났다.

"선생님 방에는 무엇이 가장 많을까요?"

"책"


학교 도서관 가득 찬 그림책 중에서 30권 추려서 연구실에 올려두었다. 30권 중에 1권에 의미를 부여했다. 우리 반 아이가 읽어달라는 책. 책에 의미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 같다.

아이들은 오늘 읽어준 두 권의 책을 반가워할 터다. 어디에서 보든지 아는 채를 할 테고 교실에서 읽은 적 있다고 하겠지.


책쓰기 무료특강에서 존재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의 존재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존재가치를 찾아야 한다. 교사, 라이팅 코치, 대학원생.

1학년 담임을 맡고 좋은 점 두 가지는 그림책을 마음껏 읽어줄 수 있다는 점, 고학년에 비해 하교 시간이 빠르다는 점이다. 안 좋은 점 한 가지는 목이 아프다는 점이다. 점점 목소리가 탁해지고 있다.

라이팅 코치로서의 존재가치는 충분히 블로그에서 언급한 것 같다. 평생 함께 쓸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자. 무엇보다도 현재 나를 믿고 글을 쓰고 있는 작가들의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는 점. 대학원생의 존재가치는 뭐지? 답답하다. 두꺼운 책을 펼치면서 잠부터 쏟아진다. 논문 대체 학기를 신청해 놓고 근무하는 학교와 일정이 맞지 않아 고민에 빠졌다. 그러면서도 박사 과정 개설된 공지를 보고 마음이 흔들린다. 석사 과정 논문 대체를 할 건데 박사 과정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 노력은 양껏 하지 못하는데 학위에 관심을 가지는 내가 신기할 정도다. 논문 대체 학기까지만 하고 말끔히 대학원 공부는 마무리하기로.


의미 부여와 존재가치.

두 가지 모두 내가 살아가는 힘이다. 책에 의미 부여하는 일도 아이들 마음 사로잡기 충분한데 '오늘'과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인생을 두고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존재가치. 글을 쓰면서 나를 자세히 바라보는 것 같다. 그동안 다른 사람을 돕는 삶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의무가 더 컸기 때문이다. 나와 부모, 식구도 못 챙기고 있는데 내가 무슨 다른 사람까지 신경 쓰나 싶었다.

책을 내고 작가 활동을 하면서 내가 가는 길이 다른 사람에게 동기를 부여한다는 점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자이언트 작가들의 연락이 많아졌다. 간단하게는 수업 링크를 물어보는 정도이고 더 깊이 들어가면 라이팅 코치에 관한 업무, 라이팅 코치를 할까 말까 등도 얘기하게 된다. 공저 서평단 모집도 전화받은 적 있다. 개인적인 고민도 나에게 말해주는 작가들을 만나면서 나의 행보가 다른 사람에게 눈에 띈다는 것, 어쩌면 나로 인해 자이언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정답 여부를 떠나 나를 내가 인정해 보는 거다.


내 주변을 둘러싼 일이 많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놓치기 쉽다. 교사가 되기 전보다는 지금이, 글쓰기 전보다는 지금이, 라이팅 코치하기 전보다는 오늘이 낫다.

실력 없는 사람이 대학원 갔으니 공부가 어려운 건 당연하다. 그래도 나는 쓸 줄 아는 사람이라고 오늘 나에게 가치를 부여한다.


쉽지 않다. 그래서 해 보는 거다. 적어도 나는 책등 빛이 바래서 구석에 꽂힌 존재는 되고 싶지 않으니까.


https://blog.naver.com/giantbaekjak/223451434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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