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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 Jan 31. 2020

햇빛과 바람으로 기르다

시래기밥

 계절학기 강의까지 모두 마친 1월 하순부터 한 달 남짓 동안은, 칩거의 시간이며 자유의 시간이다. 아니 소박한 축제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 소박한 축제의 시간이 막 시작되었다. 축제의 시간이라고 하니 좀 거창한 것 같지만, 시간에 쫓기지 않고 피곤하다는 말을 입으로 뱉지 않으면서 먹고 싶은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기간이라는 말이다.    


 소박한 축제는 굴무밥으로 시작하였고 그건 어제 아침밥이었다. 시간만 맞춰 놓으면 알아서 밥을 만들어내는 밥솥이 아니라 냄비 밥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전날 밤 자기 전에 쌀을 씻어 놓고 무도 썰어 놓고 굴도 손질해 뒀다. 비벼 먹을 간장에 넣을 달래도 넉넉히 썰어 두었다. 갓 지은 밥은 언제나 맛있다. 게다가 부드럽게 익은 무와 바다 향이 가득한 굴을 넣어 지은 밥에 달래를 빡빡하게 넣은 간장을 넣어 비벼 먹는 특식이니, 당연히 맛있고 반응도 좋았다.     


 된장을 뜨러 뒷베란다에 갔다가 물끄러미 말라 걸려있는 무시래기가 눈에 띄었다. 지난해 밭을 정리할 때 무를 뽑아와서 무청은 뒷베란다에 걸어 놓고 무는 항아리에 넣어 보관하며 먹어왔다. 무는 음식에 꼭 필요한 채소여서 때맞춰 꺼내와야 하지만, 무청 시래기는 꼭 필요한 재료는 아니어서 어쩌다 생각날 때만 찾게 된다. 오늘 아침 냄비에 지은 무굴밥이 맛있어서 그런지 이번엔 시래기밥을 해 먹고 싶어졌다.    


마른 시래기

 겨울 동안 마른 시래기는 보기에는 ‘음식 재료인가?’ 싶기도 하지만, 시래기는 봄나물이 나오기 전까지 밥상을 책임지는 중요한 음식 재료였다.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 박용래, <그 봄비> 중에서    


 잘 마른 시래기는 조금만 만져도 부서지니 조심조심 걷어야 한다. 그리고는 물을 좀 뿌려 수분을 머금게 한 다음 만져야 한다. 미리 불릴 필요는 없다. 끓는 물에 마른 시래기를 바로 넣어 십여 분 뒤적이며 삶은 다음 찬물에 담가 바락바락 씻는다. 상품으로 파는 것은 어떤지 몰라도 우리 집 무청은 밭에서 바로 가져와 말린 것이기 때문에 이물질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을 바꿔가며 몇 번 주물러 씻어 건지면 만지기에도 찰진(?) 먹음직한 시래기가 된다. 식이 섬유가 풍부한 음식 재료이니 그냥 사용해도 되지만, 좀 더 부드럽게 먹고 싶다면 얇고 투명한 바깥 껍질을 벗겨내어도 좋다. 충분히 삶은 시래기는 손가락으로 비비면 금세 투명한 껍질이 분리된다.    


삶은 시래기와 껍질 벗기기

 굴밥과 마찬가지로 시래기밥에도 채 썬 무를 같이 넣으면 식감이 더 좋다. 미리 씻어 불려둔 쌀에 일단 물부터 잡는다. 다른 재료를 넣지 않은 채 물을 잡아야 물 조절에 실패하지 않는다. 무와 시래기에서 수분이 나오니 물은 쌀로만 지을 때의 삼분의 이 정도가 적당하다. 물을 잡은 다음 무를 넣어 잘 섞고, 부드럽게 먹으려면 무와 시래기를 처음부터 넣고 시래기의 식감을 즐기려면 시래기는 밥물이 한 번 끓은 뒤에 넣어도 좋다. 시래기밥을 비벼 먹을 간장은 굴밥 때와 같이 달래 간장도 좋고 김 가루를 섞은 간장도 좋다. 다만 고루 비비기 위해 간장에 육수를 조금 타서 슴슴한 비빔 간장을 만든다.    


 알다시피 무밥, 시래기밥, 곤드레밥 등은 모두 쌀은 귀하고 식구는 많던 시절에 양을 늘리기 위한 궁여지책에서 나온 음식이었다. 어릴 적 가마솥 뚜껑이 열리면 쏟아지는 하얀 김 아래의 밥은 언제나 알록달록했다. 감자나 고구마가 섞여 있기도 하고, 쌈 싸 먹기 위해 찐 채소를 걷어낸 쪽의 밥은 퍼런 물이 들어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이런 밥은 웰빙(싫어하는 단어임)이니 해서 전문식당을 찾아 특별하게 먹는 음식이 되었다. 하지만 내겐 양을 늘리기 위한 밥도 아니고, 웰빙을 외치며 일부러 찾아 먹는 밥도 아닌, 그저 오래 먹어 익숙하고 몸에 밴 밥일 뿐이다.  

   

 어릴 때부터 집안일 하는 것을 좋아했고, 또 맏딸이라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좀 자라서부터는 밥을 하거나 음식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텃밭을 시작하고부터는 음식으로 잘 해 먹는 것이 텃밭을 잘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더 열심히 밥을 해 먹었다. 단지 그랬는데, 세월이 한참 지나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많이 바뀐 지금은 채소를 자급자족하고 김장을 담고 된장과 간장을 담아 매 끼니 집밥을 해 먹는 나를 좀 특별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경우를 종종 겪는다. 전업주부가 아니라는 이유가 붙어서 더욱.    


 어떻든 이번 생은 이렇게 생겨 먹었으니 어쩔 수 없다. 남은 날도 계속, 내 손으로 밥 해 먹으며 먹이며 살아갈 수밖에. 내일은, 내일 먹고 싶은 것을 꼭 해 먹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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