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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 Jun 07. 2020

할머니와 어묵 조림

- 밥에 담긴 가족 이야기

 일요일 아침은 언제나 그랬다. 해 다 뜬 다음 느지막하게 잠에서 깨고, 그렇게 잠에서 깰 동안 몇 번이나 일어나라는 할머니의 말을 꿈속에서 들어야 했다. 학교에 안 가는 일요일 아침의 재촉은 좀 억울했다. 그래서 잠에서 깨면서 언제나 툴툴거렸던 것 같다.


 보일러라는 것이 딱히 없던 시절, 세수를 하려면 부엌에 가서 큰 솥에 데워 놓은 뜨거운 물을 대야에 조금 덜어서 마당 수돗가로 들고나와 찬 수돗물과 섞어야 했다. 시계는 보지 않은 채 괜히 일찍 일어났다는 생각을 하며 부엌문을 열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타일로 된 부뚜막 위에 이미 밥을 담아 놓은 밥그릇과 반찬을 담은 그릇들이 나란히 줄지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 중 특히 내 눈을 사로잡는 것은 어묵 조림(오뎅이 더 친숙하지만) 반찬이었다. 어묵 조림은 그 시절 나뿐만 아니라 우리 형제들이 제일 좋아하던 반찬이었다. 그런데 부뚜막 위 그릇에 담긴 어묵 조림은 언제 한 것인지 귀퉁이가 말라 있기 일쑤였다. 


 세수를 하고 둥근 밥상에 모여 앉아 제일 먼저 그 어묵 조림을 먹어보면 겉모양처럼 역시 맛이 없었다. 촉촉함은 사라진 지 오래고 짜기만 할 뿐 엄마가 해 준 것처럼  단맛도 나지 않았다. 할머니의 어묵 조림 반찬이 맛이 없는 이유는 엄마처럼 설탕을 안 넣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너무 일찍 만든 탓에 차갑게 식어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마음이 들 때쯤엔 학교 안 가는 일요일인데 아침 일찍부터 잠을 깨운 것에 더해져 할머니를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곤 했다.    


‘할머니는 뭐하러 그렇게 일찍 밥을 해놓고 우릴 깨웠대? 할머니도 늦잠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서 어묵 조림을 했다면 따끈하고 좋을텐데......’    


 주말마다 엄마는 좀 먼 곳에서 공무원을 하시는 아버지에게 갔다. 가면서 맏딸인 내게 삼천 원쯤 쥐여주며 ‘할머니가 반찬 만들 때 필요하다 하면 사다 드려라’라고 했다. 내게 그런 돈이 있는 줄 아는 동생들은 쭈쭈바를 사달라고 떼쓰곤 했다. 할머니가 사 오라고 하는 것은 늘 같았다. 가까운 시장의 단골집에서 파는 어묵이었다. 열둘, 열셋, 남짓의 나는 시장에 가서 어묵을 사고 오는 길에 쭈쭈바도 동생 수 만큼 샀다. 나머지는 아꼈다가 엄마가 돌아오면 꼭 얼마를 남겨서 뿌듯한 마음으로 되돌려줬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 그냥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좀 짰든 식었든 어묵 조림으로 아침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이젠 간식이 먹고 싶어졌다. 이 간식의 주도자는 오빠였다. 오빠는 빵을 좋아했다. 그 당시 슈퍼에서 파는 식빵은 두 종류였다. 얇게 잘린 열다섯 조각이 들어있는 작은 포장과 서른 조각이 들어있는 큰 포장의 식빵이 그것이었다. 그 시절에도 동네 빵집은 있었지만 빵집의 식빵은 비쌌기 때문에 다섯이나 되는 우리 형제들이 먹으려면 슈퍼에서 파는 식빵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물론 식빵 서른 조각도 언제나 모자랐지만. 


 할머니가 식빵을 요리하는 방법은 큰 솥 채반 위에 빙 둘러서 쪄 주시는 것이었다. 몰랑몰랑하고 부들부들하게 쪄진 식빵을 흰 설탕에 꾹꾹 찍어 먹으며 ‘은하철도 999’를 보는 것이 일요일마다 누리던 우리의 행복한 시간이었다. 


 할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엄마는 그때의 할머니보다 더 연세가 많은 할머니가 되었다. 우리 형제도 쉰에서 예순이라는 나이 속에 순서대로 놓여 있을 만큼 시간이 오래 지났다. 작년에 쓴 글에는 텃밭을 시작한 것도 할머니를 따라 밭을 다니던 산골 소녀였기 때문이라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갈수록 자주 할머니와 할머니의 음식을 생각하게 된다.


 1899년생이었던 우리 할머니에겐 어묵이라는 것도 식빵이라는 것도 낯설고 새로운 음식 재료였을 것이다. 손자 손녀들이 잘 먹으니 어묵으로 반찬을 만들지만 익숙하게 손이 가는 양념도 다르고 음식을 만드는 기준도 달랐을 것이다. 그뿐일까? ‘아침’이라는 시간의 기준도 어렸던 우리 형제와 달랐을 것이고, 평생 농사일만 한 터라 평일과 일요일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늘 일찍 일어나야 하고 아침밥은 일찍 먹어야 하고. 그러니 서양에서 들어온 빵이라는 것도 우리 식으로 솥에 넣어 찌는 방법밖엔 생각이 안 닿았을 것이다. 이제서야 좀 알겠다.


 할머니를 따라 밭에 다니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이제 내가 기른 텃밭 재료로 열심히 밥을 해서 먹는다. 더구나 ‘코로나’라는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나니 더욱 집밥에 정성을 기울이게 되고, 멀지 않은 곳에서 자취를 하는 다 큰 아이들에게도 ‘밖에 나가 사 먹지 말라’고 당부하며 반찬을 만들어 갖다 주기도 한다. 


 이렇듯 밥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며 수십 년 동안 밥을 하다 보니 이젠, 아주 가끔은, 나도 다른 사람이 차려주는 밥상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럴 때마다 그 시절 일요일 아침, 타일로 된 부뚜막 위에 놓여 있던 어묵 조림이 떠오른다. 손자 손녀가 자는 동안 끓이고 지은 밥을 동그란 상에 펼쳐놓으시곤 어서 먹으라는 말을 하시던 그때의 할머니 밥상이 그립다. 만약 그렇다면 맛없다는 투정은 절대로 하지 않을 텐데.     


그리고 잠결에라도 꼭 한 번만 더 듣고 싶다. 

“야야, 어서 일어나서 밥 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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