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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 Apr 26. 2019

햇빛과 바람으로 기르다

산골 아이​

 나는 산골에서 태어나 자랐다. 할머니는 산 중턱에 작은 밭 여럿을 가꾸셨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할머니는 늘 내게 밭에 함께 가자고 하셨고 나도 그게 좋았다. 어쩌면 내가 따라가겠다고 먼저 말한 적도 여러 번 있었을 것이다.


 너무 오랜 일이라 따라갔던 밭에 관한 기억은 단편적이다. 고요하고 적막한 산 중턱 밭에는 새소리만 유독 크게 들렸다. 사람들이 사는 마을 근처나 도회지에 어쩌다 있는 숲이나 공원 같은 데서는 작은 새들이 조잘조잘 재잘재잘 소리를 내지만, 높은 산 중턱에 있는 밭에서 듣는 새소리는 간격을 두고 이따금씩 들리거나 껑! 껑! 같은 소리를 내어서 새가 아니라 동물의 소리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산 속에서 듣는 새소리는 울림을 타고 전해질 뿐, 소리와 소리 사이에는 적막이 흘렀다.


 할머니는 밭일을 계속 하시고, 나는 밭 가 들꽃 주위를 윙윙 거리며 나는 벌을 보거나 꽃술에 가만히 날개를 접고 앉은 나비를 바라보곤 했다. 혼자 놀이였지만 지루했다는 기억은 없다. 그랬다면 그 다음에는 할머니를 따라가지 않았을 테니까.


밭 가에 핀 민들레


 밭가에는 꿩알처럼 알록달록한 열매가 맺히는 피마자 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가을무가 한참 자랄 때면 흙 묻은 무의 껍질은 이로 쓱 쓱 베어 뱉어 버린 다음 먹기도 했다. 가을무 맛은 달았다. 하늘은 언제나 푸르렀다고 말하면 기억이 잘못된 것일까? 작은 밭에 난 정구지(부추)가 할아버지 수염 같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 뒷방은 할머니의 작업실이었다. 방문을 열어보면 흰 수건을 머리에 쓴 채 마른 들깨 가지를 바닥에 쳐 들깨 알을 털어내고 있기도 했다. 털어낸 들깨 알 무더기는 덤불과 뒤섞여 있기 마련이어서 다시 한 번 키에 담아 덤불을 날려 보내고 나면 낱알만 남았다. 그 동안 할머니가 쓴 흰 수건 위에는 들깨 덤불이 까맣게 내려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털어 낸 들깨며 말린 나물들을 군불 안 때는 건넛방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아 갈무리했다.


 봄이 되면 산엔 온통 풀들이 돋았다. 여름이 다가오면 풀 숲 아래 빨간 딸기가 열렸지만 어른들이 뱀 딸기라고 부르는 바람에 따먹을까 말까 망설여졌다. 열 살도 채 안 된 나는 풀들 중에서 딱 보면 먹을 수 있는 나물인지 아닌지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봐도 모른다. 냉이며 쑥을 캐는 일은 내겐 놀이였다. 다행히도 우리 집은 풀을 캐야만 끼니를 때울 수 있을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냉이를 한 바구니 가득 캐 올 때면 한 가지 반찬은 되겠구나 싶었다. 


도라지 싹이 났다.


열 살 때 우리 가족은 도시로 이주했다. 형제들의 공부를 위한 부모님의 선택이었다. 도시에서 살면서도 한동안은 집 앞 산에 피던 진달래와, 억수같이 쏟아져 뒤안 툇마루까지 밀려들던 한여름 장마와, 정말로 껌이 될 줄 알고 오래오래 씹었던 입 속 밀알의 텁텁하고 구수한 맛과, 한겨울 연날리기를 하고 와서는 시퍼렇게 언 손으로 떠먹던 항아리 속의 개암이 생각나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어린 밭 나들이는 잊혀져갔고, 어쩌다 옷에 흙이 묻으면 탈탈 털어버리는 도시 사람이 되어갔다. 그렇게 도시 사람으로 몇 십 년을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생각났다. 이를테면 슈퍼마켓에 진열된 씩씩하게 자란 상추보다는 일주일에 한 번 골목 장이 설 때 자주색 플라스틱 그릇에 담긴 산골 처녀 같은 상추에 더 눈이 간다는 사실을, 비닐에 깨끗하게 포장된 깻잎보다는 말린 신문지 끝에 빼꼼 얼굴을 내보이는 머위 잎이나 사발에 소복이 담긴 채 팔리기를 기다리는 작은 돌나물 순을 더 반긴다는 사실을.


 그 즈음이었나 보다. 산 중턱의 그 밭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그러니까 내가 나이를 좀 먹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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